성경공부와 큐티

내가 그니라(요18:1-14)

되어지는대로 2025. 3. 4. 06:00

내가 그니라(18:1-14)

 

  밤 중에 군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찾아왔다. “예수가 그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지는지라.” ‘내가 그니라하는 말에 왜 그들이 놀라 엎드려졌을까? 그 말씀을 반복하여 기록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특징적인 단어가 있다. 있게 된 모든 존재와 달리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존재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말할 때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라고 칭한다. 그리고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칭할 때, ‘내가 그니라라 말한다(41:4).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가 그니라하실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느낀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앞에서 권능을 발휘하지 않으셨다. 당신은 체포하되 제자들은 보내라 하셨다. 베드로는 불의한 체포를 분노했다. 칼을 빼서 휘둘렀다. 그러나 주님은 네 칼을 칼집에 넣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왜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무한한 사랑과 지혜로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시다. 베드로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거부하려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가 불의한 체포와 수난을 당하신 것,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용납하신 일이었다. 살아계신 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 주권과 선하신 뜻 아래 은혜로 귀결될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60여 년이 지나 사도 요한은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충격적인 하극상의 사건을 담담히 받아들이신 주님과 격동했으나 도망가야 했던 제자들을 기억하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의 그 사랑과 열심을, 그 아픔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내니라라는 말씀은 나를 너희들에게 내어줄 것이니 십자가 나무에 달린 내 죽음을 바라보며 선악과 나무로 인한 죄와 죽음의 저주를 십자가 나무에서 끊어내고 함께 영생의 구원에 이르라는 간곡한 사랑의 부르심이었다. 과연 오늘 나는 그 사랑과 은혜의 부르심에 온전한 믿음으로 응답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그 뜻 앞에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내 주체성,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이 앞서며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오늘도 그 별세와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기쁨, 쉬지 않는 기도, 범사의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소원한다.

 

  사랑하시는 주 하나님. 육체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뜨게 하시고 영생과 진리의 나라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선하신 뜻과 열심, 그 은혜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올립니다. 여전히 세상과 육체로 빗나가는 인생의 완악함과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우리를 향하신 영원한 사랑의 증거이며 구원의 통로이니 오늘도 주님께 마음을 드립니다.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그 은혜의 길을 의식하며 놓치지 않기 원합니다. 성령으로 이끄소서. 언제 어디서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그 영광을 찬양하게 하소서. 존귀와 영광과 능력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