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심의 종말...(삼사18:10-16)
시기심의 종말...(삼사18:10-16)
시기심에 불타는 사울에게 악령이 임했다. 그는 번뇌한다. 다윗을 부른다. 수금을 타는 그에게 분노의 창을 던졌다. 다윗은 겨우 피했다. 사울은 그를 전쟁터로 보낸다. 그가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승리한다. 백성들은 환호한다. 사울의 질투는 더욱 심해진다. 시기심과 질투에 관해 생각한다.
시기심과 질투를 구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기심으로 통일하자. 시기심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타인이 가졌을 때, 혹은 타인에게 있는 것이 자신과 같이 없어지기를 바랄 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인간이 그런 시기심을 갖는 것이 당연할까?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 대한 시기심으로 고민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자기보다 지위와 경력 등이 낮은 자가 월등한 재능을 가진 것을 알았을 때 아마 누구나 그런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시기심이 불붙는 것을 놓아둔다면 그는 결국 인격의 파탄, 파멸에 이를 것이다. 성경의 관점으로 그런 시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악을, 좋고 나쁨을 판단하며 하나님처럼 되려 한 아담의 유전적인 죄 때문이다. 에덴에서 추방되고 홀로 자기를 책임져야 하는 인류의 불행이다. 아마 자기 주체성을 고집하는 한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시기심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생이 많이 가지고 높아지기 경쟁에서 오히려 버리고 낮아지기 경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에 구애받지 않는다.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삶을 맡긴다. 그 뜻을 따라 서로 한 몸의 일부라는 지체의식으로 각자 소명의 길을 간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시기와 질투는 불필요하다. 주님과 함께 마음이 이미 세상을 벗어나 하늘에 올랐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하는가? 시기심은 마음이 그리스도를 떠나 세상에 집착할 때 일어난다.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며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과연 오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며 항상 감사, 범사의 기쁨, 쉬지 않는 기도의 삶으로 세상과 육신의 요구를 이기고 있는가?
사랑의 하나님, 주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말씀으로 함께하시며 영생의 가족으로 부르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은혜와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 안에서 모든 허물을 덮으시며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여전히 세상과 육신에 매인 채 시기와 질투, 분노와 낙심, 미련에 시달리는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의 마음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동선에 연합하며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 이르게 하소서. 오늘도 세상을 이기는 하늘의 평강과 기쁨으로 채우사 하늘에서 세우신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