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삼하4:1-12) 멘.
그는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삼하4:1-12)
아브넬이 죽었다. 이스보셋의 이스라엘은 흔들린다. 신하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을 죽이고 다윗에게 투항했다. 다윗은 그들에게 분노한다. 사형을 선고한다. 무고한 이를 죽인 살인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다윗을 위해 다윗의 적을 죽이고 투항했는데 오히려 화를 내며 죽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보스라면 누가 그의 편이 되려 할까?” 다윗의 이상한 분노를 생각한다.
다윗은 냉정하다. 그의 말은 살벌하다. 관용도 배려도 없다. 내전 중인 상대편 왕을 죽이고 투항한 자들을 죽여버렸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다윗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왜 그랬을까? 그는 자신이 유다의 왕이며 유다 지파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을 헤브론에 보내진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한다. 사실 스스로 왕이 되려는 비전도 없었다. 주께서 맡기시면 순종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유다의 편도, 자신의 편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편이다. 그의 판단과 행동의 근거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곳에 보내진 자일 뿐이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편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정말 하나님을 마음과 뜻, 힘을 다해 사랑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일생의 신념으로 삼는 대상, 나라와 민족, 혹은 어느 정당이나 이념, 사업, 가족, 심지어 자기 육신의 편이 되어서도 안 된다. 다윗처럼 철저히 하나님의 편으로 산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대할 때 상식과 이익에 따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는다. 보냄을 받은 자로서 주의 공의를 따라 반응한다. 다윗은 그들의 배신과 악함에, 유다 편으로서 이익을 떠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분노했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을 지킨 것이 아닐까? 우리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보냄을 받은 자로 살도록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오시고 죽고 부활하셨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야 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에 연합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온전한 인생이 아닐까? 오늘 우리는 우리의 평안과 이익의 관점으로, 또한 시대의 풍조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분노하고 누군가에게는 편이 되려고 하지 않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의 편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오늘을 사는가?
만유의 주 하나님, 거룩한 말씀과 선하신 뜻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주를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수시로 말을 바꾸며 논리를 만들고 고집합니다. 마음에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전능하신 주가 보고 판단하시고 참으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권을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권능을, 생명과 진리의 길을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의 생활화를 통해 영생을 살라 하셨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복음의 길로 부르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 힘입어 천국의 자녀답기를 원합니다. 연약한 자녀들을 붙드소서,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