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딛1:1-16)
입으로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딛1:1-16)
크레타섬의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시인한다. 그러나 삶의 행위로는 부인한다. 바울은 그들을 온전한 믿음으로 이끌도록 디도를 그곳에 남겨두었다. 지도자들을 세우고 바른 교훈으로 가르치게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왜 주 하나님을 입으로 시인하나 몸으로는 부인할까?
1절의 말 그대로, 택하신 자의 믿음과 경건에 이르는 진리를 아는 지식, 그리고 영생의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물질의 복 등을 좋아하고 기뻐하며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로 택하신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인 것을 안다. 온전한 믿음으로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소망을 둔다. 그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붙잡고 살아야 할 유일한 대상을 의미한다. 그 불변의 진리가 유일한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보이는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진리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하나님을 유일한 관계의 대상으로 여기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하늘에서 세우신 뜻을 이루어 간다. 죄와 사망의 땅에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 믿음과 소망으로 신자의 생각이 바뀌고 말과 행위와 삶이 바뀐다.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의 선한 행위가 드러난다. 종교는 자기 소원을 위해 신을 정의하며 뜻대로 신을 부리기 위해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세운 신비한 체계와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철저히 버리는 것이다. 그 믿음은 세상의 종교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실제로는 내 뜻, 내 소원을 위한 종교의 하나로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과연 나는 생활의 현장에서 온전한 믿음의 말과 행위로 나를 부인하며 주 하나님을 시인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바울의 책망을 받는 크레타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만유의 주 하나님,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주를 찬양합니다. 주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으나 믿음을 거부하고 지어진 세상과 자기를 사랑하며 주를 떠난 인류를 긍휼히 여기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보이는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육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며 영생의 자녀로 살기 원합니다. 온전한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으로 오직 하늘의 아버지를 바라고 소원하며 그 뜻을 이루게 하소서, 바른 교훈을 따라 몸으로도 주를 시인하며 선한 삶으로 은혜를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