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행4:1-12)
너희가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행4:1-12)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구걸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켰다. 그가 걷고 뛰며 성전에 들어간다. 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사람들이 보고 놀란다. 그들에게 모인다. 군중들 앞에서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했다. 그날에 믿는 자의 수가 5000명쯤으로 늘어났다.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소환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느냐?” 베드로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한다. 그는 두 달 전쯤 대제사장 집의 여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며 부인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대제사장 앞에서 예수를 증거한다. 제정신일까?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전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예수를 부인했다. 그것이 제정신이며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두려움을 상실했다. 그를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 앞에서 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한다. 이런 증인의 사명은 제정신으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성전 앞에서 장애인을 고친 사건도 제정신으로 한 것 같지 않다. 베드로는 이전에도 성전에 갈 때마다 그를 보았을 것이다. 아마 성전에 들어가는 모든 이가, 예수님도 그를 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날 베드로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에게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성령께서 하셨다. 성령이 명하고 그는 순종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권력자들 앞에서도 그는 담대하다. 성령이 예수를 증언하라 명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말할 것을 알려주신다는 말씀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이다. 그 목적과 결과도 증인의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성령을 간과하며 자기 힘과 노력으로 일을 하려 하지 않는가? 혹은 성령의 도움을 얻어서 자기 의,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는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의 주님께 온 마음을 드릴 때, 그리고 성령을 간절히 원할 때 그런 영적 충만함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을 간절히 구하며 실제로 받은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도 부패한 세상과 육신에 찌든 마음과 삶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과 말, 행동으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살기를 소원한다.
만유의 주 하나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주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거룩히 높이며 찬양합니다. 택하신 자들을 통해 죽음의 저주의 땅에 거룩한 역사를 일으키시며 영광을 드러내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온 마음을 드릴 때 성령을 허락하시며 놀라운 영생의 구원으로 이끄심을 믿습니다. 오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녀들에게도 성령을 베푸소서. 믿음의 자녀들이 세상과 육체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그 나라가 나타나며 그 뜻이 성취되는 영광을 보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