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벗고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행11:19-30)
편견을 벗고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행11:19-30)
스테반 사건 후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졌다. 안디옥에 온 제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 왜 예루살렘이 아닌 안디옥에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성장했다. 예수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사이에 어떤 과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구원을 받는 것과 이루는 것의 차이를 생각한다.
유대인들의 박해로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옮겨진다. 안디옥교회 전에 고넬료의 성령 사건이 있었다. 유대인 제자들의 편견,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깨어지는 과정이다. 그 후 안디옥교회가 선교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제자들의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깨어져야 한다. 육신의 삶을 통해 축적된 편견들을 벗어야 예수의 십자가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왔다. 그의 가르침은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라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라는 가르침이다. 모든 의식작용, 즉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항상 그리스도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과 일터 등 모든 생활의 현장에서 그들은 늘 주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하며 살아간다.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들어도 먼저 주님을 의식하며 말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세상의 가치관, 관습 등에서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과 뜻, 힘을 다해 주를 사랑했다. 편견과 습관에 매인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의 도를 따랐다. 주의 뜻을 이루며 구원을 이루는 삶이다. 사실 사도인 베드로마저도 편견이 깨어지지 않았었다. 환상 중에 주께서 짐승 등을 먹으라 하셨을 때도 그런 부정한 것을 나는 먹을 수 없다고 감히 항변했다. 그러나 주는 내가 깨끗게 한 것을 왜 네가 먹지 않느냐며 책망하셨다. 믿지만 그의 편견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주는 결국 그의 편견을 깨뜨리셨다. 오늘 우리도 예수는 믿지만 익숙한 생각과 느낌, 선입관에 갇혀있지 않는가? 민족주의, 인본주의, 좌파, 우파 등 세상의 논리도 그런 것이 아닐까? 과연 나는 정말 주를 기뻐하며 그 뜻을 철저히 받아들이며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여전히 십자가의 주님과 그 뜻보다 세상의 가치와 관습, 편견들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가치관과 현실도 천국의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고 소중하며 자녀들이 가장 사랑하고 기뻐할 이름임을 믿습니다. 그 영원한 주권,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나타나며 하늘에서 세우신 뜻이 삶의 모든 여정 가운데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삶을 위하여 오늘 일용할 양식과 건강을,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소서. 부패한 세상, 타락한 육신의 시험에 들지 않으며 영생과 진리의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죄와 저주의 땅을 벗어나는 구원의 문을 여셨으니 그의 나라 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소명을 이루며 찬양을 올리게 하소서.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