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히7:1-10)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히7:1-10)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첫째로 의의 왕이고 다음으로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입니다. 그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습니다. 생애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신비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은 예수를 예표한다. 아론의 후손들처럼 흠이 있는 제사장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대제사장, 그들을 찾아오신 위대한 예수를 버리고 사람들이 만든 유대교 종교로 다시 돌아가려 할까?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주이시다. 사람의 생각과 기대 이상의 초월성을 의미한다. 지극히 높음은 지극히 좋음을 상징한다. 세상의 누구도, 어떤 것도 그 높음에, 그 좋음에 비할 수 없다. 피조된 세상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에 견줄 것이 없다. 대제사장은 사망의 저주를 받은 인생들을 하늘에 계신 지극히 좋으신 주께로 인도한다. 죄 가운데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들은 번제단에서 태워지는 제물과 자신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죽음을 고백한다. 회개하며 온 마음을 드린다. 구원의 소망을 품고 집으로, 일터로 돌아간다. 생활의 현장에서도 늘 좋으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한다. 이것이 주가 원하시는 참된 제사이며 예배일 것이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주의 뜻에 못 미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다름이 없다. 왜 그럴까?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땅의 풍요와 번영, 육신의 쾌락 등 세상의 이름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육의 현실이 하나님보다 더 좋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론과 교리 속에 가두어 놓는다. 소망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경배하며 사랑한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마음은 돈과 권력, 명성 등을 소원한다. 이기적인 그 믿음은 진짜가 아니다. 하나님과 등지고 세상을 바라보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 영광에 닿을 수 없다. 아론의 후손인 대제사장들이 동물을 죽여 드리는 제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주께로 이끌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오신 아들 예수가 지극히 좋으신 하늘 아버지를 증거하셨다.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응답하는 자녀들을 품으셨다.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시고 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은 하늘의 보좌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참된 성소이며 주 예수를 따르는 것이 참된 예배이다. 오늘도 땅의 허다한 소망들을 버리고 지극히 좋으신 주께 나아가기를 소원한다. 그 제사를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이미 드리지 않으셨는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절대 평강과 기쁨으로 이 땅에서부터 영생이 시작되기를 기도한다.
만유의 주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주를 찬양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의 살아계심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좋으심도 알 수 없습니다. 은혜로 마음의 눈을 뜨고 부활과 영생의 세계를 소원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새 언약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확증하며 성령을 통해 영생의 길로 부르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영생과 진리의 세계로 이끄시는 대제사장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마음도 하늘의 아버지께 이르게 하소서. 육신의 삶도 성령께서 이끌어 그 뜻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며 지극히 좋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