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나은 언약의 대제사장 예수(히7:11-22)
다 나은 언약의 대제사장 예수(히7:11-22)
만일 제사장들이 완전했다면 아론의 계열을 따르지 않고 멜리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다른 대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직이 변하면 율법도 변하게 된다. 전에 있던 계명은 약하고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나은 소망이 들어왔고 이를 통해 우리는 주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주께서 예수에게, 너는 영원히 제사장이라고 맹세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가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시다. 주께서 보증하신 더 나은 소망과 언약을 생각한다.
돌에 새긴 계명과 구약의 율법은 주의 진노와 이스라엘의 실패로 약하고 효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선민 이스라엘의 소망이 사라진 것이다. 사실 그들의 소망은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거룩한 나라를 이루며 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소망이 아니었다. 언약도 잘못 해석했다. 열방 위에 군림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영광을 기대했다. 번제를 드리면서도 자신의 죄의 체질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 성전의 제사와 섬김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였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뻐하지 않았다. 때가 되어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아들 예수가 오셨다. 더 나은 소망이며 더 나은 언약의 증거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옛 소망, 옛 언약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과 육신의 영광을 더 좋아하며 추구한다. 사람들은 다시 세상의 일과 성취로, 육신의 쾌락을 구하는 현실로 돌아간다. 하나님과 그 나라의 위대함과 좋음을 자신의 현실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영생과 진리의 새 소망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왜 지극히 높고 좋은 천국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소망하지 않을까? 죄에 젖은 완악한 자신의 본성과 사망의 저주 속에 사는 자기 현실을 깨닫지 못하기 떄문이 아닐까? 구약의 율법은 선민들의 죄성을 깨우치며 철저한 회개로 돌이키기 위한 예표로 주어진 것이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온전한 회개로 더 나은 언약의 말씀, 더 나은 소망을 붙들고 있는가? 그저 내 육신의 번영과 안전만을 소원하며 옛 언약과 율법을 붙들고 행위의 회개만 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나는 온전한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 예수를 따라 하늘 아버지께 온 마음을 드리며 천국을 향해 돌아서 있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과 그 나라와 그 뜻이 오늘 우리 모든 삶의 현장에서도 나타나고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런 삶을 위해 오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악한 시험에서도 건지실 것을 믿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아들 예수의 그리스도 사역으로 구원의 문을 여셨으니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며 하늘의 아버지께 우리의 마음도 이르게 하소서. 담대한 믿음과 끊김이 없는 소망, 하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가운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고 하늘로 돌아가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