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마음, 듣지 않는 마음(잠13:1)
듣는 마음, 듣지 않는 마음(잠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그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자녀와 듣지 않는 자녀가 있다. 지혜로운 자는 훈계를 듣는다. 듣지 않는 자는 거만한 사람이다. 왜 듣지 않을까? 듣는 마음과 듣지 않는 마음을 생각한다.
거만한 마음은 이미 충분하다며 자만하는 마음이다. 자신이 온전하다고 믿기에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아들인데도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감히 창조주가 틀렸거나 무능하다고 주장한다면 패역한 것이 아닌가? 성경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를 불신하고 뱀의 말을 들었다고 기록한다. 그들은 주께 범죄하고 죽음의 저주에 걸렸다. 기쁨의 동산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인류는 여전히 미혹에 빠진 채 저주받은 땅에서 스스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다. 자신이 괜찮은 존재이며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음의 저주에 빠진 현실을 부정한다. 존재의 근거를, 선악의 판단을 자신에게 둔다. 주는 영생의 구원을, 온전한 삶의 지혜를 주시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가득하다. 악한 영, 부패한 세상과 육신의 미혹에 갇혀 있지만 구원이 필요 없다고 믿기에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과 육신에 묶인 마음이 죽지 않으면, 부패한 생각이 비워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주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거만한 마음이 죽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아들로서 영생의 길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기회가 왔는데 왜 누구는 듣고 누구는 듣지 않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주의 택하심과 뜻에 달린 것이며, 우리는 각자 은혜로 생명의 말씀을 듣는다. 왕 솔로몬이 구한 것처럼 일천 번이라도 자기를 죽이며 주의 말씀 듣기를 소원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그리스도가 있다. 그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우리 마음이 하늘의 아버지께 연결되는 길이 아닌가? 과연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 무지한 인생들에 주의 거룩한 이름과 그 말씀을 듣게 하시며 하늘의 평강과 기쁨으로 이끄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이 땅에 내려와 죽고 부활하고 다시 오르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오르며 창조주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사랑받는 자녀의 합당한 삶으로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그 말씀을 듣게 하소서.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아버지를 거역하는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