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그는 예수와의 결별을 택했다(눅22:1-13)

되어지는대로 2024. 3. 25. 06:24

그는 예수와의 결별을 택했다(22:1-13)

 

   유대의 최고 종교기관인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죽이기로 정했다. 가룟 유다가 그들과 손을 잡는다. 예수와의 결별을 택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 등은 예수와의 동행을 택했다. 물론 예수가 잡히실 때는 모두 도망갔다. 그들과 가룟 유다의 차이를 생각한다.

 

   가룟 유다는 영리한 사람이다. 신념과 열정의 인물이다.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꿈꾼다. 조국을 점령한 로마를 증오한다. 미래의 비전을 품고 성공과 성취를 갈망한다. 그가 예수를 따른 이유는 그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신념과 소원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을 깨달았다. 예수는 조국의 독립이나 성공, 번영 등 세상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별세(Exodus), 곧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실 것이다. 오직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있다. 그는 그런 예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소원은 이 땅에서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과 열망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와의 결별을 택한다. 사실 예수를 향한 믿음은 동선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 땅에서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 계속 움직이신다. 옆도 앞도 아니다. 위를 향하신다. 세상을 탈출하여 아버지가 계신 하늘을 향해 가신다. 제자들에게도 나를 따라 함께 가자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출발해 하늘의 아버지께로 행하는 천국행 기차를 타는 것과 같다. 당시 기득권자인 대제사장 등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았다. 가진 것이 아깝기에 두고 떠날 수 없다. 가룟 유다도 소원과 신념의 형태로 세상의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다. 그도 세상을 떠날 수 없다. 세상의 있음과 좋음의 느낌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말씀보다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더 소원하며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간다. 예수를 버리기로 정한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런 신념이나 소원이 없었다. 예수의 능력을 보고 일시적으로 그런 소원을 품긴 했으나 본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그들에게 성령이 들어간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그들은 영생과 진리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 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 그 주권을 체험한다. 그들은 십자가 복음의 길에 동행한다. 남은 삶을 모두 주께 맡긴다, 사실 우리도 날마다 예수와의 결별, 혹은 동행을 택해야 하지 않는가? 지금 여전히 세상의 있음과 좋음을 실감하며 추구하는가?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따라 별세와 부활, 승천의 길에 동행하고 있는가? 유다처럼 육신의 소원과 판단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 아버지께 대해 산 자로 그 뜻을 수용하며 오늘을 사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통해 자녀 삼으시며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보이는 세상과 육신의 현실감보다 하늘 아버지와 천국의 현실감을 더 크게 느끼며 참 평강과 기쁨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 길은 예수의 말씀과 십자가 사역에 연합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그 은혜를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소서. 세상 끝까지 함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