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까지 참으라(눅22:39-53)
이것까지 참으라(눅22:39-53)
“제자 중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니라.” 예수가 잡히시는 장면이다. 유다가 데려온 사람들이 예수를 체포한다. 베드로가 칼을 빼서 휘두른다. 예수가 제지하신다. 이것까지 참으라 하신다. 그는 악한 현실에 분노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만두라 하신다. 왜 참으라 하실까? 하나님이 악한 현실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믿음을 생각한다.
믿음은 보이고 들리는 세상의 가치와 상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불의를 없애며 개혁과 개선을 원한다. 악을 제거하며 땅에서 지상 낙원을 이루고 싶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럴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온전한 믿음,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한 자녀를 원하신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로는 그런 낙원은 불가능하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태초의 아담은 지상 낙원인 에덴에서 주를 배반했다. 부족함이 전혀 없는 기쁨의 동산에서 사탄의 말에 미혹되었다. 마음에 부족함을 느낀 것이다. 하나님을 불신했다. 스스로 세상의 선악을 판단하며 하나님처럼 되기를 택했다.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그로 인해 땅은 죄와 죽음의 저주에 갇혔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서는 사람이 먼저 선악과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주받은 땅은 사라질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 사람이 이 땅에서 스스로 낙원, 곧 자기들만의 유토피아를 이루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사탄의 속삭임을 즐거워하며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동행하지 않으신다. 창조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것이여 부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뜻, 그 선하심과 좋으심을 신뢰하며 지금 당하는 이것까지도 참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진행된 모든 일이 주의 뜻임을 수용하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저주의 고난을 수용하셨다. 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에게, 또 스테반과 바울 등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에게 그런 처절한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사랑하신다면 육신의 고난도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또 사랑하면 그들은 그런 고통까지 견디며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 자신이 본 주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좋았으면 스테반은 분노의 아우성 속에 맞아 죽으면서도 고통을 잊고 얼굴에 미소까지 지었을까?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까지 드리지 않았는가? 모두 믿음의 시험을 이기며 하나님과 천국의 좋음을, 그 영광을 드러낸 증거가 아니겠는가? 오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마음에 밝히 보이기를, 그래서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은혜의 길에 오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사랑과 은혜의 주 하나님, 영생과 진리의 구원은 청결한 마음으로 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은 주 앞에 설 수 없으며 에덴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본받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늘의 아버지께 온 마음을 드립니다. 연약한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은혜를 베푸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참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그 뜻을 따르며 영생과 진리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