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다(눅23:33-43)
그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다(눅23:33-43)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가 예수를 모욕한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 다른 죄수가 꾸짖으며 말한다. “너도 십자가 처형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것으로 마땅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리고 말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답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날 그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었을까?
그는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본다. 내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내 죄 때문이며 죽음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께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며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 죽음이 우리에게 이유가 있음을 고백한다. 더 이상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육신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 육신에 종속되었던 마음이 이제는 오직 십자가의 주님께 향한다. 주님과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미련을 둘 세상의 어떤 것도 없다. 하늘에 모든 소망을 두고 은혜를 청한다. 바로 그날,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금요일에 그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께 마음을 드린 자, 곧 그 십자가에 연합하는 자는 그 마음이 곧 낙원을 체험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낙원은 물리적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일 뿐이다. 창조주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육신이 죽으면 시간과 공간의 세상은 사라진다. 영의 세계는 인격적 관계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 삼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본래 계획하고 뜻하신 낙원이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비유처럼 하늘 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되며 완전한 마음의 채움, 곧 기쁨과 안식으로 충만함을 의미한다. 성경은 몸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한다. 잠이 들면 시간과 공간의 의식이 없어진다. 깨는 순간에 그는 잠이 든 그 순간의 의식으로 일어난다. 잠자는 동안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그처럼 몸이 죽는 순간 우리는 의식을 잃는다. 주님의 품 안에서, 낙원에서 잠이 드는 것이다. 눈을 뜨고 의식이 깨어나는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상관이 없는 신령한 몸으로 예수를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죄수도 그날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죽은 아브라함도, 또한 바울도 죽은 그날 그 상태의 의식으로 눈을 뜨며 주님을 볼 것이다. 그 죄수도 금요일에 죽고 잠이 들며 금요일의 의식으로 다시 눈을 뜨고 주님을 볼 것이다. 따라서 몸이 죽는 그날이 바로 그의 종말이며 또한 재림의 날이 아닐까? 그래서 몸이 죽는 순간까지 믿음을 지켜라, 항상 깨어 있으라 명하신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내 몸이 죽는 그때 세상과 육신을 향한 갈망이나 미련, 또는 후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모든 소망을 두며 영혼을 의탁할 수 있기를, 그래서 다시 눈을 뜰 때 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주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 영생의 구원을 약속하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이끄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죄를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는 죄인에게 구원을 베푸심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영의 눈과 귀가 열리며 하늘의 영광을 보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과 육신의 매임에서 자유와 참 평강과 기쁨을 얻는 길은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께 온 마음을 드리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에 우리 마음도 함께 오르며 낙원에 이르게 하소서. 영생과 진리의 나라,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보게 하소서.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