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을 제어하는 나그네는 자유인이다(벧전2:11-25)
정욕을 제어하는 나그네는 자유인이다(벧전2:11-25)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사도 베드로는 흩어진 성도들을 거류민과 나그네라 부른다. 그들은 정착민이 아니다. 탐심과 정욕을 제어하는 나그네는 구원을 받는다. 반대로 정착민은 심판을 받는다. 나그네와 정착민의 차이를 생각한다.
거류민과 나그네는 일시적으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이다. 있는 곳이 태어난 곳이 아니다. 종착지도 아니다. 세상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본문의 나그네는 여행을 즐기며 두루 다니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리 여행하며 돌아다녀도 그는 역시 땅에 마음을 둔 정착민이다. 성경의 나그네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가 계신 하늘을 본향으로 여기며 마음을 둔 사람이다. 세상의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판단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세상에서 정착할 곳을 찾지 않는다. 육체의 정욕과 소원을 제어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기 때문이다. 풀은 마르고 그 꽃은 떨어진다. 세상의 일과 관계도 결국 썩어질 몸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기억을 잃듯 세상의 것들도 그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오직 주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함을 아는 자가 하늘나라에 오를 것이다. 죄와 죽음의 저주에서 영생과 진리의 구원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땅에서 나그네의 길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겠는가? 그 십자가의 길에서 나그네 신분의식을 얻으며 별세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썩어질 몸의 탐심과 정욕을 제어하며 시기와 질투, 거짓과 비방의 말도 버릴 것이다. 개인적인 어떤 형편에서도, 악한 사회적 환경에서도 자유롭다. 세상에서 그는 자유인으로 산다. 물론 그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종이기에 자유로운 것이다. 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위의 권세에도 순종할 수 있다. 집착과 미련에서 벗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며 절대 평강과 기쁨도 누릴 것이다. 세상을 향한 욕심과 미련이 없으니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한다. 항상 아버지의 생각과 뜻을 따라 겸손하게 말하며 행할 것이다. 더 이상 세상과 육신의 이익과 안정을 소원하는 정착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런 것처럼 보내신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나그네로 살 것이다. 그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인생이 아닐까? 주님의 별세와 부활을 늘 의식하며 생활화할 때 선물로 받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할 것이다. 오늘도 육체의 기억과 욕구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나그네의 소명을 이룰 수 있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가 우리가 나온 곳이며 돌아갈 집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것은 영생과 진리의 구원에 합당한 자녀가 되기 위해 예수의 말씀을 따르며 그 십자가의 별세와 부활, 승천의 길에 믿음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나그네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마음에 거룩히 여겨지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과 공생애를 늘 의식하며 하늘에 우리의 마음도 오르게 하소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뜻을 이루며 찬양을 올리게 하소서. 세상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