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현실에 마음이 갇힌 사람들(왕하6:24-31)
비참한 현실에 마음이 갇힌 사람들(왕하6:24-31)
아람 왕 벤하닷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다. 성에 갇힌 사람들은 절망한다. 굶주린다. 물가가 오른다. 엄청난 인플레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나귀 머리가 수천 만원이라 한다. 마침내 자기 아기를 잡아먹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은 분노한다. 옷을 찢으며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맹세한다. 비참한 육신의 현실 앞에서 책임을 창조주께 돌리며 분노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스라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조상 아브라함과는 너무나 다른 믿음으로 살아간다. 세상과 육신의 성공, 성취, 물질의 풍요와 번영을 갈망한다. 먹고 마시며 감각적 기쁨에 취해 살아간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육적인 삶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뜻, 그의 거룩한 백성임을 잊었다. 홍수 심판을 받은 인류의 죄와 타락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탄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번제를 드려도 자기 죄를 대신해 어린 양이 죽고 있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모른다. 비록 안다고 해도 삶의 현장에서는 곧 잊어버린다. 육체의 굶주림이 생명의 위기이며 전부라고 생각한다. 육의 양식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처음 받은 믿음의 시험이 목마름과 굶주림이지 않았나? 그들은 배가 고프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육신의 고통을 겪으면 하나님은 무능하거나 자기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 그 절대적 주권을 믿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자기를 부인하라 요구한다. 마음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채워지면 생명을 먹은 것이며 육의 양식도 채워질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육의 양식을 위해 식인도 사양하지 않았다. 고난의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한다. 불평과 원망, 저주의 불길에 휩싸인다. 믿음도 양심도 버리고 자폭한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다. 생명은 육에 있지 않다. 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있다. 육의 죽음 너머 부활의 세계가 위에 있다. 보이는 몸, 생명의 양식으로 땅에 오신 예수께서 나를,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 하셨다. 영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를 마음에 가득 담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채우도록 비워진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위에 있는 영의 세계에 연결이 되며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주의 뜻이 남아 있다면 육의 양식도 공급을 받고 그들은 땅에서 남은 삶을 통해 소명을 이룰 것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배를 채우는 음식 등 오감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사는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배부르며 창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지 않는가?
사랑과 공의의 주 하나님, 만물과 역사를 사랑과 지혜와 권능으로 주관하시는 주를 찬양합니다. 무지하며 완악한 인생은 자기 생각과 느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이시며 긍휼과 은혜로 부르시고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이끄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드려진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 죽음에 연합하며 함께 죽은 자로서 부활과 승천에 이르게 하소서. 하늘에 마음이 닿으며 참 평강과 기쁨을 알고 찬양하게 하소서.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으로 우리도 세상을 이기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고 영광을 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