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쁨과 만족, 그리고 세상의 일과 관계에 대해서(24.7.8)
삶의 기쁨과 만족, 그리고 세상의 일과 관계에 대해서(24.7.8)
사람들은 행복을 원한다. 세상에서 자신이 좋다고 믿는 것으로 마음을 채우며 기쁨과 만족을 구한다. 일하며 관계를 맺는 것도 그런 유익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 대부분 돈이나 권력, 신분과 지위의 상승, 명성, 인기 등이 만족과 행복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이 인정하는 부자나 권력자, 혹은 원하는 성과와 성취를 얻으면 기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으로 완전하며 지속적인 기쁨을 체험하기는 어렵다. 솔로몬도, 철학자들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인생은 완전한 기쁨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우리는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채집가 혹은 사낭꾼들이 아닌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먼저 너희 창조주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 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가르친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영이신 하나님을 대신해 물질 세상에서 높고 선하신 뜻을 이루도록 지어진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마음으로 그 생각과 판단, 계획을 받아서 실행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비어있는 상태로 지으셨다. 당신께서 그 안에 들어오려 하셨다. 그러므로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맞춤형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불순종의 죄를 지은 아담의 후손들이며 저주받은 땅에서 살고 있다. 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유전적 죄와 저주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 마음은 세상에 있게 된 어떤 것으로도 온전히 채울 수 없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가 없다. 물론 공부와 수행을 통해 상당한 경지에 이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려는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기쁨, 영광의 천국에 이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으셨다. 당신의 파트너로, 천국의 가족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선택하신 주 하나님을 자기도 선택해야 가능하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자신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다른 것을 사랑하며 마음에 채우면 그는 하나님을 받을 수 없다. 그 선하신 뜻을 이룰 수도 없다. 창조주께 범죄하며 스스로 섭리적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죽음과 저주의 길을 택한 삶이다. 이스라엘이 그렇지 않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면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완전한 평강과 기쁨과 만족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권자이시며 유일한 좋으심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 하나님을 아는 그에게 세상의 일과 관계는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은 그에게 창조주의 뜻을 이루는 사명이 된다. 더 이상 자기만족, 자아실현 등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받은 기쁨, 하나님의 은혜를 발산하기 위해 세상에서 일을 하고 관계를 맺을 것이다.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이미 기쁨과 만족의 상태에서 일을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본래 사람의 길이다. 그는 하나님의 편이다. 더 이상 기쁨을 채집하거나 사냥하려고 세상을 돌아다니지 않는다. 땅이 아니라 하늘, 곧 주최측에 속한 자며 하나님의 측근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에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론과 교리로는 알지만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신자는 얼마나 될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고 항상 유지하는 사람은 가능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실제 그렇게 살았다. 그는 주의 말씀을 따라 무조건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기근으로 그 땅을 또 떠나야 했다. 약속의 땅을 마음에서 버렸다. 하나님만을 바라본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이방의 왕에게 내주어야 했다, 독자 이삭까지도 마음에서 버렸다. 하나님이 그에게 가장 큰 좋음이며 사랑이며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복들을 빼앗기지 않게 하셨다. 그의 인생을 책임지고 주권적으로 인도하셨다.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획하며 주도적으로 살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자기 삶에 대한 주권과 주체성을 전부 버리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사실 하나님은 세상의 축복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놓치지 않을까 염려하며 무려 25년이나 기다리다가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축복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아들 이삭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지도 않았다. 99세 때에는 서자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달라고 했다. 오래전 사라의 생리가 끊어지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사라를 통해서는 아들을 안 주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주의 전능하심을 못 믿은 것이 아니다. 믿지만 자기에게 특별한, 예외적인 특혜를 기대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에게는 축복의 약속과 선물이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 가장 소중했다. 그러므로 그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지 않았다. 약속하신 선물을 빨리 달라고, 세상의 자기 유익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고 늘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가나안땅을 떠나고 아내를 버리며 또 여종 하갈을 취한 그의 믿음을 자기 수준으로 해석하며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행여나 그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자기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수용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보고 안심하신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과 같은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본래 사람의 인생이 아닐까?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 복을 주려 하시지만 죄와 타락에 젖은 채 세상의 복에 마음을 빼앗기며 빗나가는 믿음을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버지를 대신해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가 늘 보고 지켜내야 할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오늘도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기쁨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마음에 밝히 보이기를, 날마다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활화가, 하나님 사랑의 생활화가 우리 삶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십자가 복음 방송 태승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우리 믿음에 대해서 잘못 들어온 관점들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아침에 적어봅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