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혹독한 고통에 넘겨주었으나(왕하13:1-13)

되어지는대로 2024. 7. 19. 05:48

혹독한 고통에 넘겨주었으나(왕하13:1-13)

 

   예후가 죽고 아들 여호와히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백성들을 죄짓도록 만든 여로보암의 길을 그도 따른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람에 넘겨주었다. 아람은 혹독하게 그들을 괴롭혔다. 여호와히스가 은총을 간구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땅에는 아세라 목상이 남아 있었다.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죄를 생각한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 그들은 주 하나님을 기억했다. 은총을 구했다. 구원을 베푸셨다. 그러나 잠시일 뿐이다, 편안해지면 마음이 다시 세상을 향한다. 세상과 육신의 일에 몰두하며 일상의 기쁨과 만족에 취해 살아간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 하늘에 계신 창조주이며 먼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사랑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사람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온 마음을 다 드리며 밀착하는 것이다. 아마 그 시대 이스라엘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받은 율법과 성전이 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구원의 확신도 있다고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 삶으로는 이방인들처럼 세상의 풍요와 번영 등을 소원하며 마음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 마음에서 거룩히 여겨지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었다. 돈과 권력 등 세상과 육신의 이름들이 거룩히 소중하게 여겨졌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돈이 많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낙심했다. 그것은 돈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며 금송아지 앞에서 경배하는 삶이 아닌가? 위기를 겪을 때 그 믿음의 허상이 드러난다. 그들은 단지 육신의 안전을 위해 주 하나님을 찾았을 뿐이다. 자기 사랑, 자기 이름을 위해 신을 찾으며 믿음을 동원한다. 그러나 믿음은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오직 주 하나님의 영광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고향 집과 가나안 땅, 아내와 아들까지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받은 선물과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아까워하며 행여라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가 아닌가?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를 따라 마음을 하늘의 하나님께 드렸다. 그의 몸은 이제 하나님의 도구로 그 뜻을 위해 쓰임 받는다. 어떤 스펙도, 돈도 필요 없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몸 하나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통로로 살았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그렇게 살지 않았는가? 엘리사가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건재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이스라엘은 하늘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날 기회가 사라졌다. 오늘 우리는 그런 믿음의 본질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가? 위기만 피하려고 주를 찾지 않는가? 달콤한 사탕과 같은 세상의 좋음에 취해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만나가, 매일의 양식이 더 맛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 마음도 하늘의 구원에 이르기를 기도한다.

 

   창조와 구원의 주 하나님, 염려 가운데 징계와 구원을 베푸시는 주께 감사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길래 그리 마음을 쓰시며 언약의 말씀과 함께 예수를 내어주시며 구원을 베푸시는지요. 그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며 오늘도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립니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것입니다. 죄에서 떠나는 그 별세와 부활의 길을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축복과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와 아들의 기쁨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감사와 기쁨과 기도로 살게 하소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