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실패로 드러난 이론 믿음의 한계(왕하18:13-25)
현장의 실패로 드러난 이론 믿음의 한계(왕하18:13-25)
히스기야가 산당들을 제거했다. 우상에 걸려 빗나간 유다의 신앙을 개혁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본래 믿음을 회복했다. 아하스 왕의 친앗수르 정책도 버렸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다, 앗수르가 침략했다. 잔인한 군대가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왔다. 두려운 현실 앞에서 그는 앗수르 왕에게 굴복한다. 은과 금을 끌어모아 바쳤다. 그의 믿음은 이론뿐이었다. 현장에서 무력했다. 이론 믿음과 현장 믿음, 그리고 세상의 현실과 하나님을 생각한다.
선민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 스스로 계신 그의 유일성과 영원성, 절대적 주권 등 그분의 속성도 알고 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며 구원하시는 은혜도 믿는다.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이론이라면 그는 종교의 교리를 아는 것이다. 현장 믿음이 아니라면 아직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은 현실에서 무능하다. 믿음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 아마 오늘의 신자들이 초대 교회의 신자들보다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알 것이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그들처럼 믿음의 능력이 드러나는가?. 히스기야는 이론 믿음을 회복했다. 그러나 위기의 현장에서 그 믿음은 사라졌다. 그는 눈앞의 현실에 굴복했다. 그에게는 앗수르 왕이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선지자의 예언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믿음이 허상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앗수르의 1차 침공에 그는 무너졌다. 그리고 또 실패한다. 반앗수르 동맹을 위해 이집트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외국의 도움을 구하지 말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지 않았다. 세상과 육신의 현실만 바라보며 위에서 보고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다. 앗수르의 2차 침공을 당한다. 이집트는 그를 도울 능력이 없었다. 처참한 지경에 놓인다. 피할 수 없는 믿음의 시험이다. 이론 믿음은 반드시 현장 믿음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히스기야는 죽음의 위기와 두려움 속에서 침묵의 법을 배운다. 마음을 추스르며 현실에 갇힌 자기를 부인한다. 침묵으로 세상을 등지고 하늘의 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한다. 1차 침략 때도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 기도에는 침묵이 없었다.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대비책을 세우며 자기를 위해 주의 능력을 동원하려 했다. 하나님은 세상의 문제 앞에서 우리 판단을 위해 동원되는 분이 아니시다. 시선을 돌려 마음과 몸을 다 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진정한 의뢰이며 믿음일 것이다. 오늘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그런 믿음의 시험들을 겪는다. 과연 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며 선하신 뜻과 계획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을 믿는가? 그 이론 믿음이 실제 현장에서도 골리앗 앞의 다윗처럼 하나님을 보는 믿음의 능력으로 드러나는가? 히스기야가 현장에서 배운 침묵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연합하며 세상에 대해 함께 죽는 믿음이 아니겠는가?
전능하신 주 하나님, 완전한 사랑과 지혜와 권능으로 우리 가운데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주체성을 따르며 자기가 첵임지려는 것은 교만이며 죄입니다. 주를 믿고 의뢰함은 두려움에 갇힌 자기를 버리고 침묵하며 오직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심과 좋으심, 그 주권과 다스리심을 놓치지 않기 원합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아버지께 우리 마음도 이르게 하소서. 마음은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지상의 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선하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존귀하신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