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히스기야 기도의 변화(왕하19:14-28)

되어지는대로 2024. 8. 5. 05:58

히스기야 기도의 변화(왕하19:14-28)

 

   앗수르 왕이 신성 모독의 편지를 보냈다.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가지고 성전으로 올라간다. 그들이 감히 주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이른다. 분노한다. 이것은 유다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주 하나님의 문제라 한다. 앗수르의 침략 앞에서 자기는 발을 뺀 것이다. 앗수르의 1차 침공 때와 다른 그의 태도를 생각한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현장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들었다. 이 상황을 이미 주께서 아시며 대책을 갖고 계신 것도 알았다. 이제 그의 마음에서 현장의 권력 구도가 바뀌었다. 전에는 앗수르 왕과 자신이 싸우는 양자 구도였다. 자기가 이기고 살기 위해서 주의 능력을 동원하려 했다. 실패했다. 이집트의 도움을 청했다. 또 실패했다. 이제 그는 위기 앞에서 무능한 자기가 빠지는 법을 알았다. 그 현장을 앗수르 왕과 하나님의 양자 대결 구도로 보게 된 것이다. 위기의 현장에서 발을 빼듯 자기 마음을 빼내었다. 두려움에, 책임감에도 사로잡히지 않았다. 적 앞에서 무조건 침묵했다. 세상과 적들 앞에서 시선을 돌렸다. 하나님께 도망가서 그 뒤에 숨은 것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악한 인간의 편지를 읽었다. 주의 이름 때문에 분노했다. 참담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제 그의 기도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 문제 해결, 내 소원을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기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 위기, 내 상황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이렇게 내 생각과 판단, 내 주체성을 내려놓고 주께 모든 것을 의뢰하는, 곧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믿음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세상의 문제와 자기를 위해 쏟으며 하나님을 땅으로 내리려는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과 육신을 등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피신하는 믿음이다. 예수께서 그러신 것처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오직 아버지께 들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하는 순종이 온전한 믿음의 삶이다. 그런 삶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자의 몸으로 땅에 와서 십자가 별세와 부활, 승천의 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은 삶의 현장에서 먼저 침묵이 필요하다. 그 침묵은 자기 부인을 의미한다. 침묵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곧 세상과 육신에 쏠리는 마음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믿는 천국 자녀라면 늘 삶의 현장에서 유지되어야 할 믿음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신자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예수님도,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며 탄식하지 않으셨는가? 그 죽음과 거듭남의 믿음을 소망하며 오늘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뢰하기 위해서 죄에 젖고 완악한 내가 죽는 기도를 드린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만유의 주이십니다.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하며 마음을 드리는 자를 자녀로 받아 사랑하며 기뻐하십니다. 그 믿음과 소망으로 죄와 저주의 땅에서 하늘로 시선을 돌립니다. 밀려오는 세상의 미혹과 악한 소리 앞에서 차라리 침묵하겠습니다. 아버지께 삶을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하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삶의 현장에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성취되게 하소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오늘을 살며 찬양을 올리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신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