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가 망한다는 예언을 그가 듣다(왕하20:12-21)
유다가 망한다는 예언을 그가 듣다(왕하20:12-21)
히스기야가 죽을병에서 살아났다. 주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의 목숨을 연장하셨다. 그러나 곧 그는 실패한다. 위문차 온 사신들 앞에서 교만했다. 은혜로 말미암아 형통하게 된 자기를 드러내며 보물들을 자랑했다. 이사야가 책망한다. 자랑한 보물들을 빼앗기고 후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한다. 유다가 망한다는 예언이다. 이 사건은 히스기야 재위 14년, 곧 그의 인생 중간에 있었던 일이다. 말년의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히스기야의 기록이 끝난다. 성경은 왜 이 사건으로 그의 인생을 규정하며 마무리할까?
히스기야의 인생을 그의 기도들을 통해 규정하며 온전한 믿음과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닐까? 그는 산당을 제거했다. 믿음의 정도를 회복하고 나라를 개혁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취, 곧 세상에서 형통하게 된 자기를 기뻐했다(예수님도 전도에 성공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하셨다). 하나님께서 병으로 그를 데려가겠다고 시험하셨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믿음과 선행, 즉 공로를 들추며 자기가 살아야 한다고 면벽하며 간구했다. 눈물의 기도로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 기쁨에 그는 자기 능력과 나라의 재물들을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교만에 취했다. 그리고 선지자의 책망과 함께 유다가 망할 것이라는 두려운 예언을 듣는다. 그의 믿음은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이어서 앗수르의 1차 침공을 당한다. 그는 진짜 망할까 두려워하며 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지 못했다. 곧 앗수르 왕에게 굴복하며 은금을 모아 바쳤다. 수치를 느낀 그는 이집트에 도움을 청했다. 또 실패했다. 2차 침공을 당하며 그의 기도가 바뀐다. 이제 자기가 아니라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기도한다. 비로소 그는 세상의 문제와 위기 앞에서 자기 발을 빼고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기도한 것이다. 이런 기도의 문제를 들추어내기 위해 그의 삶 중간에 있었던 일을 마지막에 기록하며 그의 인생을 마무리한 것이 아닐까? 오늘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자기 공로와 믿음, 주체성을 주장하며 특혜를 얻어내려고 기도하지 않는가? 내 공로가 아니고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인데 왜 스스로 기뻐하며 자랑하는가? 사도들은 그런 기적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자기를 칭송하는 것을 옷을 찢으면서까지 참담한 마음으로 거부했다. 오직 주 하나님께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며 영광을 올리게 했다. 자기가 세상의 찬양을 받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를 낮추는 것이 믿음이다. 재물 때문에 예수 따르기를 포기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처럼 자기 주체성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여전히 부족한 믿음이다. 오늘 나는 어떤 기도를 드리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 땅에서 성취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매일 드려야 하지 않는가?
만유의 주 하나님, 사랑으로 짓고 보존하며 구원하시는 주를 찬양합니다. 땅은 저주를 받았고 타락한 인류는 죽음에 갇혔으나 한없는 사랑과 은혜로 구원하시니 감사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며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길을 위해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 주체성, 내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아버지를 향해 거듭나야 합니다. 오늘도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마음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 땅에서 성취되게 하소서. 끝까지 믿고 순종하며 세상을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