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그는 왜 아버지와 반대의 길을 택했을까(왕하21:1-9)

되어지는대로 2024. 8. 9. 06:17

그는 왜 아버지와 반대의 길을 택했을까(왕하21:1-9)

 

   므낫세가 12세에 유다 왕이 된다. 그는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는 개혁을 이룬 히스기야다. 그러나 그 아들은 개혁 이전으로 나라를 바꿔 놓는다. 오히려 혼돈과 저주의 악한 상태를 극대화시킨다. 그는 왜 하나님과 아버지를 떠나 악한 길을 택했을까?

 

   성경은 태초의 죄로 인간이 죄와 죽음의 저주에 걸렸다고 설명한다. 창조주를 거부하는 악함이 자연인의 본성이며 이미 인간 안에 자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세상의 좋음보다 하나님의 좋음을 택했다. 다윗은 그 믿음을 고난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적용하며 살아냈다. 히스기야는 주를 떠난 선민들의 이론적 믿음을 개혁하며 그 정체성을 회복했다. 그 믿음을 현장의 실제 믿음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아버지의 믿음과 보이는 현실의 격차를 므낫세가 보고 오해하며 실족한 것이 아닐까? 그는 반대로 자연적 본성을 따라 실리를, 세상의 풍요와 번영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닐까? 아버지 그리고 왕 밑에서 그동안 억제되었던 인간의 욕망이 분출된 것이 아닐까? 그는 세상과 육신의 복을 마음껏 추구했다. 아버지가 없앤 산당들을 다시 세웠다. 바알과 아세라, 또한 일월성신 등까지 도입해서 섬겼다. 점을 치고 무당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들까지 우상에 바치며 복을 빌었다. 거룩과 경건의 믿음과 정반대의 길을 적극적으로 택했다. 아예 성전 안에 아세라 목상과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제단도 세웠다. 이제 백성들은 성전을 피해 산당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성전에서도 세속적인 풍요와 번영, 쾌락 등 육신의 소원을 위해서 기도한다. 오히려 성전이 활성화되며 사람들이 넘친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전에서 사탄, 곧 악령에 미혹된 육신의 이익을 마음껏 소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악한 마음을 따라 저주의 길을 가는 것이다. 선민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더 악하고 교만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런 부패한 성전을 쓸어 버리셨다. 그것은 성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도 뺏으셨다. 불법의 땅을 합법의 땅으로 세탁하도록 주신 가나안을 더 불법의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므낫세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많지 않은가? 인기를 얻고 숫자를 늘리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당 안에서도 육신의 풍요와 번영 등을 마음껏 구하라고 설교하지 않는가? 육의 악한 본성과 부패한 마음이 가는 그대로 적극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부인과 회개의 길, 곧 십자가의 별세와 부활의 영성을 가르치셨다. 세상과 육신에 쏟는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리게 하셨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라, 하늘 아버지께 온 마음을 드리며 그 평강과 기쁨에 연합하라 명하셨다. 그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아닌가? 오늘도 주 하나님을 향한 바른 영성을 위해 이끄시는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며 오직 하늘 영광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정직한 믿음이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본성을 깨우치며 영생과 진리의 구원으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믿음은 십자가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의 아버지께 온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그 나라가 우리 삶의 현장에 임하며 하늘에서 세우신 뜻이 이 땅에서도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몸을 유지하게 하시고,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시험에 들지 않으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생명과 진리로 이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