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 대해 완강한 자들은 애굽으로 간다(왕하25:18-30)
불행에 대해 완강한 자들은 애굽으로 간다(왕하25:18-30)
유다가 망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무너졌다. 왕족, 귀족 등이 포로로 잡혀갔다. 바벨론은 유다를 완전히 없애려 하지 않았다.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게 했다. 그러나 계속 반역했다. 바벨론 왕은 분노하며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처참한 재앙을 당했다. 본문에는 바벨론이 임명한 유다 사람 그달리야 총독을 유다 사람들이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나온다. 무엇을 지적하는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 주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율법과 성전을 자랑한다. 오해였다. 하나님도 자기 현실도 몰랐다. 장엄한 성전을 바라보며 자기들은 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 믿었다. 그 성전에 전능하신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착각이었다. 그곳에 주의 이름은 없었다. 온 마음을 주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성전에서 경배하나 그들의 마음은 세상에 가 있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 세상과 육신에서 오는 즐거움에 사로잡혔다. 하나님께는 마음이 멀었다.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이미 주께서 떠나신 그곳은 성전이 아니었다.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그들이 당한 재앙, 그 고난과 불행은 주께서 그들의 죄로 인해 허락하신 것이다. 이미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주의 심판과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인정한다면 그 재앙과 불행도 수용해야 했다. 바벨론의 통치 아래 죄를 회개하며 잠잠히 살아야 했다. 수치와 모욕을 견디며 하늘에 계신 주께 마음을 돌이키며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반역했다. 다윗의 혈통이라는 이스마엘은 평민 출신인 그달리야 총독 밑에서 살기를 거부했다. 그를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간다. 하나님의 교정적 주권과 그 뜻을 거부했다. 은혜로 출애굽한 선민임을 스스로 부인하고 애굽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마 사람들을 선동해 총독을 죽일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과 낮아짐도 하나님의 주권과 허락 아래 일어난 일이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선하심을 믿는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며 주어진 상황에 순응해야 한다. 마음을 찢는 회개의 삶으로 용서를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잡혀간 자들의 귀환도 주께서 시작하셨다. 포로로 잡혀간 다윗의 씨 여호야긴이 풀려나고 바벨론 왕에게 대접을 받게 하셨다. 여러 나라의 볼모 중에 그가 특혜를 받았다. 원수로 여기며 반항하던 바벨론에 의해서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기치 않은 불행과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요셉도 다윗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수용하지 않았는가? 그 불행이 오히려 복인 것이 나중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오늘도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예수께 온 마음을 드리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 사랑과 공의의 지혜에 닿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
만유의 주 하나님, 한없는 사랑과 지혜로 보존하며 구원하시는 주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환란과 역경을 허락하심은 자녀들을 선으로 이끌며 거룩한 자리에 세우시려는 뜻임을 배웁니다. 그 사랑과 공의의 주권을 온전히 믿는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수용하지 못할 고난도 없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의 참된 현실이며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성령을 허락하소서. 은혜로 깨우침을 얻으며 담대한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쁨과 기도, 감사로 살게 하소서. 존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