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벽 쌓기의 장애물, 세상이 주는 두려움(느6:1-14)

되어지는대로 2024. 9. 10. 06:17

벽 쌓기의 장애물, 세상이 주는 두려움(6:1-14)

 

   성벽을 거의 다 쌓았다. 산발랏 등이 음모를 꾸민다. 느헤미야를 성 밖으로 불러내 죽이려 했다. 여러 번 편지를 보내 만나자 했다.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가 반역하며 유다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낸다. 같이 상의하자고 한다. 역시 거부했다. 제사장 등을 매수했다. 암살을 당할 것이니 당장 성소에 가서 숨으라 한다. 이런 모든 음모는 선민들의 결속을 깨뜨리며, 왕과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간질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실족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렇듯 벽 쌓기의 마지막 장애물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이 아닐까? 소외와 배척, 세상의 좋음과 차단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신자가 이겨야 할 믿음의 시험이 아닐까?

 

   적들은 지도자를 죽여서 선민 공동체를 와해하려 한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거짓된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그가 페르시아 왕에게 반역을 시도하며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잘 아는 제사장도 매수했다. 죽음의 두려움을 주며 성소에 들어가라 했다. 그는 제사장이 매수된 것을 깨달았다. 제사장 외에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율법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짓지 않았다. 성경은 이런 음모들이 선민들에게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라 설명한다. 두려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의 마음을 도저히 채울 수 없다는 위기와 좌절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죽음의 두려움도 기쁨과 만족을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천국의 존재와 좋음을 정말 믿는다면 몸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세상과 육신의 좋음만 믿고 하나님과 천국의 좋음은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얻기 전과 다름이 없이 세상과 육신의 즐거움만 알고 소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좋으심, 전능하신 주권과 신실하심을 정말 믿는다면 세상의 일과 환란, 몸의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신 뜻, 그 허락 아래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으로 주 하나님을 믿는 느헤미야는 그런 세상의 음모와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친한 제사장조차 매수된 것을 알고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세상이 조롱하며 비웃던, 분노하며 두려워하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성벽은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오늘 우리가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먼저 두려워해야 하지 않는가? 왜 세상과 육신의 연관성, 그런 것들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영광의 창조주 하나님께 드릴 마음을 빼앗기는가?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몸의 죽음을 평온히 받아들인 스테반처럼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영생의 나라, 그 위대한 영광을 보고 참된 기쁨과 평강을 실감하며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의 말씀과 사역으로 아버지의 계심과 사랑, 권능과 신실하심을 계시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으로 말미암는 걱정과 염려, 두려움은 아직 믿음이 약하며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주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 곧 그 별세와 부활에 연합하는 삶이 죄와 죽음의 저주를 이기는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세상에 대해 주님과 함께 죽을 때 하늘 아버지의 영광이 보이며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의 길에 있기 원합니다. 오직 청결한 마음, 온전한 믿음의 자녀가 아버지를 뵐 것입니다. 그 이름만을 거룩히 여기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하소서. 시험을 이기며 그 영광을 찬양하게 하소서. 영원한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