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문을 늦게 여는 이유(느6:15-7:4)
예루살렘 성문을 늦게 여는 이유(느6:15-7:4)
마침내 성벽을 완성했다. 성문을 달고 문지기 등을 임명한다. 느헤미야는 충직한 사람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뽑아 지키게 한다. 이상한 명령을 내린다. 해가 높이 뜰 때까지 성문을 열지 말라 한다. 이 명령은 어떤 의미일까? 세상의 성들은 아침 일찍 문을 연다. 남보다 먼저 더 열심히 일하며 잘 살기 위해서다. 예루살렘의 성문을 늦게 여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과 다른 기준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생각한다.
당시 세상의 성문은 해가 뜨면 열고 해가 지면 닫았다, 날이 밝으면 곧 성문을 연다. 풍요와 번영, 성취를 위해 부지런히 교류하며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다르다. 그들이 성벽을 쌓고 문을 지키는 이유는 부패한 세상의 영향력을 차단하며 성전을 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선민답게 살기 위해서다. 성전 중심의 삶, 곧 성전의 생활화가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는, 이를테면 돈과 권력, 명성 등을 위한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의 중심에 있는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 상번제가 드려진다. 어린 양이 대속의 번제로 바쳐진다. 타락한 세상과 육신에 사로잡힌 자기를 대신해 죽는 양을 바라보며 죄인 된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유일하게 스스로 계신 창조주 앞에서 세상의 지어진 것들에 마음을 쏟는 불신과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다해 주를 사랑하고 기뻐하며 그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삶이다. 타락한 문화와 종교, 우상 등 세상의 풍조와 벽을 사이에 두는 삶이다. 보이는 세상과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사는 자연인과 구별된 삶을 명하셨다. 주의 마음에 접속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며 선한 뜻을 땅에서 이루게 하신다. 그러나 믿는다는 우리도 여전히 세상의 풍조에 부응하며 육신의 만족만을 구하지 않는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하나님인 것처럼 말하고 행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먼저 죄인 됨을 깨닫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마음의 시선을 세상과 육신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이키라 가르치셨다. 구약에서는 그것이 성전 중심의 삶이었다. 성전이 사라진 이 시대 그것은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의 생활화, 곧 주님의 별세와 부활, 승천의 과정에 연합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래야 세상과 육체에 붙었던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은혜로 채워진 후에 성문을 열고 아버지의 뜻 아래 세상과 교류하며 소명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민은 돈과 명성 등 세상의 빛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빛이, 그 영광이 마음의 중천에 떠오를 때에 비로소 문을 열고 세상의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나는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삶을 시작하는가? 마음에 태양처럼 빛나는 것이 돈, 명성, 건강 등 세상과 육신의 것이 아니라 과연 창조주 하나님이신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며 그 빛 아래 하루를 시작하는가? 여전히 마음에 벽이 없는 이방인들처럼, 혹은 벽은 세웠으나 항상 문을 열어놓은 채 세상의 거짓된 조명 아래 무심히 사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계신 주 하나님,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으며 하나님을 뵐 것입니다. 청결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오직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미 마음을 차지한 세상의 것들을 죽이고 청결케 하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세상에 대해 이미 죽었고 오직 하나님께 대해 사는 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 뜻을 이루게 하소서. 십자가의 주님, 그 안에서 항상 기쁨, 쉬지 않는 기도, 범사의 감사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영원한 길과 진리,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