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에 근거한 삶은 저주 아래 있다(갈3:10-18)
행위에 근거한 삶은 저주 아래 있다(갈3:10-18)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주 아래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율법 기준의 행함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모두 저주 아래 있다고 한다. 신자의 현실 인식과 온전한 믿음을 생각한다.
창조주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 이후 인류는 저주 아래 살고 있다고 성경은 지적한다. 율법이 있든 없든 모두 사람은 죄와 죽음의 저주 아래 놓여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세상이 아니다. 아담의 후예들은 여전히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주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잘 살기 위해 행위원칙을 찾고 그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려 한다. 물론 충동적 행동은 미친 짓이다. 율법, 곧 바른 행위원칙을 따르는 것이 그나마 옳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원칙을 찾으며 바르게 행동하겠다는 사람들조차 창조주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본질적인 선악과의 죄, 곧 태초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선민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원초적 죄성, 곧 사탄의 시험 앞에서 아담이 실패한 창조주 믿음과 순종을 회복해야 한다. 스스로 판단하며 마치 창조주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기가 죽어야 한다. 그 죄와 저주에서 나오도록 예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 죽음으로 죽음의 저주를 끊어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은 둘로 나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생명에 연결된 세상과 그리스도의 밖 곧 여전히 죽음의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이다.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욕구하며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께 들은 것만 행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오직 성령을 따라 살 것이다. 창조주께서 뜻하신 본래의 사람이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스스로 행위원칙을 세우며 자기 선행과 공로로 구원에 이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그리스도의 은혜, 창조주의 사랑과 공의. 한없는 지혜와 주권을 거부하고 피조된 세상을 피조물인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뜻을 세우고 고집하는 것이다. 하늘의 주께 향해야 할 마음이 육체에 붙은 채 저주를 택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스스로 판단하고 행위원칙을 세우며 살지 않는가?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스스로 판단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마음을 드리며 그 안에서 성령으로 받은 아버지의 뜻을 이룰 뿐이다. 오늘도 육체의 행위가 아닌 오직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
사랑과 은혜의 주 하나님, 율법과 원칙의 매임에서 자유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며 구원을 이루려 하나 죄와 저주에 젖은 육신으로는 불가능함을 깨우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거듭나야 합니다. 마음이 주님의 옷을 입고 아들의 영을 받으며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죽음에서의 해방이며 자유입니다. 이제는 혼돈과 저주의 땅을 벗어나 하늘 아버지와 아들의 기쁨에 연합하는 은혜의 길에 오르기 원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받으며 항상 기쁨, 쉬지 않는 기도, 범사의 감사로 살게 하소서. 그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게 하소서, 참된 자유와 영광의 길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