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사는 성도(계22:1-5)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사는 성도(계22:1-5)
21장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성전이 따로 없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해나 달도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을 비추며 어린양이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외에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올 수 없다. 생명수의 강이 보좌에서 흘러나와 성 가운데로 흐른다. 강 옆의 생명나무는 매달 열매를 맺고 나뭇잎들은 나라들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왜 그곳에 치료가 필요할까? 새 예루살렘에도 질병과 아픔이 있다는 것일까? 오늘의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계시록 처음에 주님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준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모든 시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예언이다. 어린양 예수의 신부로 부르신 성도는 죄와 저주의 체질을 벗는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저주받은 땅에서 시험과 환난을 이긴 믿음의 성도들은 어린양과 결혼, 곧 완전한 결합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기쁨 안에서 하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는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는다. 예수님처럼 모든 일과 관계에서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 그 영광에 취하며 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성도들은 천년 왕국의 왕으로서 자기 주변의 관계로 이루어진 각자의 나라를 공생애로 살아간다. 몸이 죽으면 그 의식은 주님 품에서 잠든다. 재림 때에 눈을 뜨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직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록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살아있는 동안 마음이 십자가의 어린양과 연합하고 십자가 별세와 부활의 길을 따라 하늘에 오른 자들은 죄와 저주에서 자유를 얻으며 새 예루살렘을, 곧 거듭난 성도의 인생을 산다는 뜻이 아닐까? 죽은 후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땅에서 에덴을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들은 참 성전이신 주님 안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말하고 행할 것이다. 그 마음은 하늘의 생명수를 마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와 잎들이 맺히는 에덴을 살며 각자 자기 나라에서 주변의 아픈 자들, 잘못된 관계들을 치료할 것이다. 다시는 눈물이 없고 저주가 없는 인생을 살 것이다. 그렇게 땅에서부터 천국을 살다가 몸이 죽으면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의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주께서 이 땅의 성도들에게 준비하신 복이며 영생과 진리의 구원이 아닐까? 과연 오늘 우리 안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며 생명나무의 열매와 잎들이 맺히는가? 삶의 현장에서 온전한 믿음의 말과 행동으로 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좋으심, 그 영광을 드러내며 기쁨으로 이웃을 섬기는가? 그런 성도의 삶을 위해 오늘도 십자가의 생활화, 곧 주님의 별세와 부활과 승천의 길에 연합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이 닿기를, 하늘의 생명수로 마음을 채우며 오직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를 등지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저주를 벗지 못하며 에덴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생명수로 얻는 완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비하신 복된 삶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의 부르심에 마음을 다한 믿음과 사랑으로 응답할 때 얻을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께 마음을 드리며 연합한 자녀들은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예수를 따라 세상의 환난에서 하늘 아버지께로 나오는 흰옷의 성도로 살기 원합니다. 성령을 허락하소서. 그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쁨의 찬양을 올리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