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파악한 예수, 위협감도 존재감도 없는 사람(요19:1-3)
빌라도가 파악한 예수, 위협감도 존재감도 없는 사람(요19:1-3)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부하들에게 넘겨주었다. 군인들이 가시관을 씌우고 때리며 모욕했다. 그는 예수의 무죄를 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달래려고 채찍질을 허락했다. 예수를 방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폭동과 소요는 막아야 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관리이며 정치인일 뿐이다. 이방인이 본 예수와 유대인들, 그리고 예수의 나라에 속한 인간상을 생각한다.
빌라도는 정치인이다. 거래와 담합에 능할 것이다. 사람과 일을 파악하며 이익을 구하는 처세술에 달인일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 식민정부인 로마에 대한 저항 의지도, 능력도 없음을 알았다. 세상과 자기 현실에 대한 개혁, 개선의 의지도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문제가 있을 때는 자기방어와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그런 의지조차 없다. 무색무취의 맹물과도 같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 존재감도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증오한다. 반역의 죄목을 붙이며 죽이라고 외친다. 총독은 그들의 종교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군중의 분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예수는 그저 무능하며 불쌍한 청년일 뿐이다. 선민들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였나? 기적의 능력이 있다. 불치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을 먹였다. 세리와 창녀의 친구였고, 지도자들에게 욕을 했다.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장사꾼들을 쫓아냈다. 당신이 바로 그들이 고대하던 그리스도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나라의 독립과 번영, 부패한 사회 현실의 개혁 등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 권력에 대해서 무능한 존재로 드러났다. 그들은 분노와 적개심에 휩싸였다.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판단하며 말하고 행하는 분이 아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의 나라에 속한 자는 세상 나라에 속한 자와 다른 방식으로 산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세상에서 자기 이익과 방어를 위해 살지 않는다. 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그 뜻을 위해서 산다. 세상의 눈에는 비겁하고 무능하며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씀이 임하면 과격한 자로, 온유한 자로도 바뀔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없다면 세상에 대한 어떤 의지도, 색깔도 없는 맹물과도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사건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선하신 뜻을 창조적이며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신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인격으로 사는가? 빌라도와 같은 세상의 정치인들처럼 자기가 속한 조직의 입장과 현실의 이익만을 위해 살지 않는가? 당시 제사장과 유대인들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하나님과 이웃에 분노하고 부정하며 제거하려는 종교인들은 아닌가? 자기를 부인하신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세상이 아니라 오직 하늘 아버지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사랑, 믿음, 소망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사는 천국 자녀이기를 오늘도 소원한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사랑과 공의, 지혜와 권능은 오직 주께로 나오며 주께 속한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주장하지만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주의 살아계심과 선하심, 영원한 주권에 순종할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땅에서부터 천국을 살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의 구원과 특권을 놓치지 않기 원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영생과 진리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깨끗이 비워진 마음에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이 빛나게 하소서. 어떤 처지에서도 그 영광을 바라보며 감사의 찬양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