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들지 말라,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요20:11-23)
붙들지 말라,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요20: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께로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무덤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가 나타나셨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한다. 동산지기인 줄 알고 사라진 시신에 대해 묻는다. 마리아야 부르시는 말씀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붙잡았다. 그러나 붙들지 말라 하신다.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하늘로 올라갈 것을 알리라 하신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가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는 것은 부활의 몸이 평범하다는 뜻이다. 부활의 나라에 속한 자를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제자들은 부활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는 삶의 현장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평범한 모습의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육신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나라에 속한 그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그 뜻을 위해 살 것이다. 마리아가 기뻐하며 붙잡았을 때, 주님은 이제부터 그들이 겪을 새로운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알리려 하셨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그리고 이전에 주님과 친밀하게 지낸 세상의 삶을 기대했다. 껴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아직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씀은 지금 나는 세상이 아닌 부활의 나라에 머물고 있으며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계신 부활의 나라는 육신으로 만나는 세상 나라와 삶의 방식이 다르다. 이전처럼 주님을 인자로, 랍비로 대하며 함께 끈적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 사역을 다 이루신 주님은 이제 그들이 전에 알던 그분이, 인자가 아니다.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가 본래 하나님이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도 부활의 세계에 속한 성도로서 스승 예수를 구원과 심판의 주 하나님으로 여기며 전과 다른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우정, 의리, 박애, 애국심 가족 사랑 등 인간 중심, 세상 중심의 사랑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상관이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주님, 그리고 천국을 향한 아가페적 사랑이 영생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이어진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다. 성령과 함께 사명도 주신다. 부활의 나라의 특징은 참 평강과 기쁨이다. 그들은 이전의 그들이 아니다. 부패한 세상과 육신에 젖은 자기를 벗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남은 사명을, 공생애를 감당할 것이다. 40일의 침묵,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충격적인 과정이 더 필요하다. 그래야 마음이 주님의 별세와 부활과 승천의 길에 온전히 연합하며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 우리는 부활의 나라에 속한 성도로 살고 있는가? 여전히 세상과 육신의 입장에 집착하며 마음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더는 세상과 육신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기를, 성령의 보호와 인도 아래 영생의 나라를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
거룩하신 주 하나님, 영생과 진리의 나라는 그 말씀과 십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마음을 드릴 때 임할 것입니다. 세상과 육신의 어떤 영광보다도 좋고 아름다운 영광의 세계를 믿음과 소망으로 바라봅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주님, 성령이 이끄시는 이 십자가 별세와 부활, 승천의 여정이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탈출하며 천국에 들어가도록 예비하신 최선의 길임을 믿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그 나라, 그 이름과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게 하소서.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