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다(요20:24-31)
부활은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다(요20:24-31)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 보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했다. 주님이 나타나 그에게 못 자국을 보이셨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가르치셨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온전히 믿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의 목적은 세상을 개혁, 혹은 개선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의 믿음과 새 생명을 위한 것이었다. 소수의 사람을 발탁해 그들로 세상을 벗어나 부활의 나라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부활 후에도 주님은 부패한 세상을 바꾸지 않고 바로 떠나셨다. 그 의미를 생각한다.
부활하신 몸으로 빌라도나 대제사장 등 대중 앞에 나타나셨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들에게 권능을 보이셨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소수의 사람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셨다. 3년의 공생애 때 기적을 베풀며 만난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숫자의 제자들에게만 당신을 보이셨다. 사도 바울은 500여 명이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다고 기록한다. 왜 그러셨을까? 물론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의한 것이다. 아마 기적을 보고 따르는 것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기적을 보고 믿는 자들은 결국 가룟 유다처럼 배반하게 될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다. 왜 주님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과 무덤이 필요했겠는가? 죄와 저주에 찌든 인간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그들이 부활의 나라로 초대받은 선민들이다. 세상 나라를 떠나 부활의 나라에 들어온 그들로 말미암아 십자가 복음이 세상에 전해졌다. 이제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영생의 구원을 받을 성도들이다. 죄와 저주의 세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아직 그 자격이 없다. 물론 소수의 신자로 세상이 바뀌기도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부패한 세상의 변화와 개혁에 있지 않았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늘 아버지께 돌아온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타락한 세상을 빠져나와 부활의 나라에 들어오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기쁨에 참여하는 한 영혼을 기뻐하신다. 세상은 사라지나 천국은 순전한 사랑과 기쁨의 영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부패한 세상과 육신에 매인 자아가 죽고 믿음으로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며 영생의 나라에 마음이 닿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며 기뻐할 일인가?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보이는 세상과 육신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 쏟으며 그것이 옳다고 믿지 않는가? 과연 우리는 우리의 순전한 믿음과 영생을 원하시는 아버지와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그리워하는가? 부패한 세상의 것들을 욕구하고 소원하며 사랑하시는 주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야 할 소중한 마음을 더럽히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도 부활의 주님, 그리고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마음을 드리며 하늘의 평강과 기쁨으로 채워주시기를, 지상의 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부활의 나라를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오며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태초의 타락하지 않은 아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영원한 사랑과 기쁨 안에 머물기 원합니다. 죄와 죽음의 저주에 젖어 있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인자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의 연쇄 과정을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오늘도 그 십자가의 주님께 마음을 드립니다. 우리 마음도 부활의 나라에 오르게 하소서. 참 평강과 기쁨은 오직 주님이 열어주신 부활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은혜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존귀와 영광과 능력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