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오직 예수,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요21:18-22)
믿음은 오직 예수,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요21:18-22)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수제자인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신다. 그가 젊을 때는 스스로 옷을 입고 원하는 곳을 다녔으나 늙어서는 남이 네게 옷을 입히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수십 년 후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이미 베드로를 포함해 많은 사도들이 순교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당시 베드로는 야단치시는듯한 주님의 싸늘한 말씀에 충격을 받으며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한다.
제자들은 주님과 3년을 동거동락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 그러나 승천하실 때까지도 그들은 말씀을, 주님의 마음을 몰랐다. 언제 이스라엘이 독립하며 다윗 왕국의 번영을 재현할 것인지 물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은 세상과 육신의 영광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주님은 분노하셨을 것 같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 마음을 드리라 가르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세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주님을 좋아한다. 사랑하며 믿었다. 그러나 마음의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하고 있었다. 늙어서 남이 네게 옷을 입히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은 심지어 네 몸의 죽음마저도 네가 상관할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네 관심의 눈길은 세상과 몸이 아니라 오직 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 별세와 부활, 승천의 길을 따르지 않는 한 부활의 나라, 곧 영생과 진리의 천국과 하나님의 마음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육체로 얻은 신분과 지위, 부모, 형제, 처자. 재산, 성취, 심지어 네 몸의 죽음마저도 네가 상관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선하신 판단과 주권, 그 뜻대로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만 바라보고 내 뒤를 따라오라, 그러면 너는 세상에 없는 평강과 기쁨을 체험하며 내가 있는 천국으로 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려움, 시기심 등으로 주님께 옆에 있는 요한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물었다. 주님은 차갑게 답하셨다. “그를 너보다 훨씬 오래 세상에서 살게 한들 네 몸의 죽음마저도 네 마음에서 버리라 했는데 도대체 그런 것들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오직 나만 바라보고 따르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처럼 영생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그가 가신 십자가 별세와 부활, 승천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도 세상과 육신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매일 고백은 하지만 마음은 익숙한 세상과 육신에 대한 욕구와 미련, 두려움, 걱정, 불안 등을 떨쳐버릴 수 없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하며 완전한 주권과 선하심을, 한없는 사랑과 공의와 지혜와 권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은혜와 그 능력을 여전히 믿지 않는 것이다. 늙어서 네 몸의 길, 질병과 죽음마저도 네가 염려할 대상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르며 그 마음이 주님께 함께 하늘 아버지께로 향하고 있다면 스테반 집사처럼 뜻하지 않는, 억울한 죽음의 순간에도 천국의 영광을 느끼며 평안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오늘 우리 마음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왜 염려하는가?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와 주기도의 생활화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와 감사와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소원한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소서, 성령으로 함께하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 영광과 능력이 오직 주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