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던 입에서 불평과 원망도 나온다(민11:1-9)
감사하던 입에서 불평과 원망도 나온다(민11:1-9)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사람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선민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행진한다. 뜨거운 낮에는 구름이 그들 위를 가렸다. 그런데 그들 중에 악한 말이, 불평과 원망이 들린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 불을 내려 진영의 경계를 태우셨다. 그들은 왜 원망했을까? 벌써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일까?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출애굽의 기적을 본 지 오래되지 않았다. 홍해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믿음과 순종을 맹세하며 언약식도 올렸다.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난 지 불과 삼 일이다. 그런데 불평과 원망의 말이 나온다. 진영 끝에 불이 난 것은 에덴의 경계를 불 칼로 지키시듯이 하나님과의 분리와 차단을 의미한다. 언약에서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그 권능을 잊었을까? 불과 일 년 전에 홍해의 기적을 경험했다. 그 감사와 기쁨을 잊었을 리 없다. 말씀을 듣고 언약을 맺었다. 며칠 전에 유월절 절기도 지켰다. 그렇게 찬양하던 입에서 이제는 불평과 원망이 나온다. 이전의 감사와 기쁨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지금의 불평과 원망도 거짓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본성적 죄의 체질이기 때문이다. 감사도 육체에 근거했고, 원망도 육체로 인한 것이다. 모두 육체의 감각에 근거했다. 마음이 육체에 붙었고 탐욕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감사도, 원망도 몸의 환경과 처지로 인한 것이었다. 찬양도 자기 이익과 안전에 근거한 일시적, 감상적인 것이었다. 그런 육체의 감사와 찬양은 영생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관계가 없다.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늘 기뻐하는 성도의 믿음과 다르다. 마음이 여전히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자기를 하나님처럼 여기는 선악과의 결과, 곧 죄와 죽음의 저주에 갇혀 있는 것이다. 체질적 탐심이며 완악한 것이다. 사실 우리도 그런 욕구의 충족으로 감사하지 않는가? 그러나 선물로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이 믿음이며 사랑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마음의 시선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옮겨져야 한다. 주님도, 전도의 성과로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이름이 오른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다. 먹고 배부르기 위해 찾지 말고 표적을 보라 하셨다. 그러므로 영생의 믿음은 세상과 육신의 일로 감사와 기쁨, 혹은 불평과 원망을 오가며 요동하지 않는다. 주님 안에서 하늘 아버지로 인한 참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믿음이다. 초대교회의 스테반과 성도들처럼 육체의 환경과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감사하며 또 무엇 때문에 불평하는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마음에 밝히 보이는가? 그렇다면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의 은혜, 아버지의 사랑, 그 선하심과 주권을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나? 오늘도 그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 범사의 감사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하시는 주 하나님, 보이지 않는 영이신 주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보이는 세상과 육신에 마음을 쏟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주에 매인 자녀들에게 열어주신 구원의 하늘길을 바라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영의 눈과 귀가 열리며,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그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소서. 감사를 놓치지 않으며 부족이 없는 오늘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