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4일 오전 08:57
최상의 법...(약2:1-13)
야고보는 강한 어투로 명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말라. 겉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지 말라. 성경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 사랑이 최상의 법이며, 만일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 가르친다. 다시 강조한다. “자유의 율법으로 심판 받을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라.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왜 이처럼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 금지를 강조할까?
교회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다. 아마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따돌리는 일이 있지 않았을까? 사도는 분노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세상의 조직과 달라야 한다. 그들에게 최상의 법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조직에서는 차별이 당연하다. 위계질서를 세우고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보존과 발전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셨다. 죄와 사망의 길로 치닫는 세상에 사랑이 최고의 법인 것을 가르치려 오셨다. 당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의 실천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긍휼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긍휼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다.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경외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은혜로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자유케하는 율법으로 심판 받을 것처럼 사랑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 증거가 당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긍휼의 표현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표시는 무엇일까? 고난 받는 자, 하나님을 모르는 자, 약자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아닐까? 혹시 나도 나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자기 의만 구하며 만족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사랑이 내 인생 최고의 법인가?
긍휼의 하나님, 무지하고 연약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의 찬양을 올립니다. 부패한 땅에 사랑과 공의의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시고 완성하시는 주의 뜻을 생각합니다. 헛된 욕심과 미혹, 차별과 교만의 죄로 인해 다시 사망의 길로 돌이키지 않기 원합니다. 주의 한없는 긍휼로 구원의 길에 들어왔으니 기뻐하시는 사랑, 긍휼을 실천하며 선하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그 은혜의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오늘도 자기를 부인하며 긍휼을 실천하며 삶으로 예배하는 참된 신자의 승리가 있게 하소서.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