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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8일 오전 09:02

되어지는대로 2020. 4. 8. 09:02

두 가지 고통...(막14:32-42)

겟세마네의 기도장면이다. 예수님이 탄식하신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있으라.”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도 여러 차례 예언하셨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심한 고통을 토로하실까? 스테반은 죽을 때 얼굴이 평화로웠다. 베드로도 처형 전날, 감옥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예수님의 고통은 단지 십자가의 고통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과 신자의 고통에 관하여 생각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공생애를 살아내셨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와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저주의 자리, 흑암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신다. 몰론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분리되는 고통은 너무나 크다. 육신을 넘어 마음이 죽는, 영원한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사랑과 공의의 역사다. 순종으로 그 뜻을 이루신다. 그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을 겪으셨다. 세상 속의 우리도 세상과 분리되는 고통을 넘어야 한다. 익숙하고 좋은 세상과 격리되는 고통이다. 돈과 명예,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 아플 것이다. 그러나 택하신 자녀들은 그 과정을 넘어야 한다. 세상에 매인 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주께 모든 것을 맡기며,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아야 한다. 하늘 아버지와 본향을 그리며, 참된 생명과 기쁨의 소망으로 이겨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다. 오히려 영원한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기쁨의 고통이다. 오늘 나는 그 십자가를 넘어 새 생명의 날을 사는가? 고통이 없다면 아직도 땅의 것을 즐기며 하늘 아버지를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나는 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새로 산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은혜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으로 비천한 자녀들을 생명과 진리의 나라로 구원하심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고통을 견디신 주님처럼 익숙한 세상의 죄와 분리되어 정결한 신자, 사랑받는 자녀의 자리에 오르기 원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참담한 죄의 본성, 악한 세상의 현실을 깨우치며, 은혜의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 감사와 기쁨으로 참여하게 하소서, 담대한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신자의 승리와 기쁨을 경험하게 하소서, 끝까지 함께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