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절망보다 더 절망적인...(욥17:6-16)

되어지는대로 2021. 11. 3. 08:54

절망보다 더 절망적인...(17:6-16)

 

욥이 탄식한다. “내 인생이 지나갔고 내 마음의 생각마저 부서졌도다. 그들이 밤을 낮으로 바꾸니 어둠으로 인해 빛이 짧구나.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덤으로 내 집을 삼는 것이요, 어둠 속에 내 침대를 깔아놓는 것이로다.” 친구들은 희망을 권하나, 욥은 희망을 택하지 않는다. 절망을 택한다. 세상과 다른 그의 믿음을 생각한다.

 

세상은 희망을 노래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꿈과 비전을, 희망을 잃지 말라 권한다. 그들은 밤을 낮이라고 말하며 서로에게 용기를 가지라 한다. 그러나 그 빛은 미약하다, 사실은 희망 고문일 뿐이다. 세상의 것들을 향하는 그들의 희망은 사실 절망보다 더 절망적인 희망이다. 그러나 욥은 세상의 가치에 대해 절망을 수용한다. 그의 인생 경영이 끝났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죽음을 수용한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체념과 자살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욥에게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그를 세상 밖,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인생 경영에 대한 그의 절망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희망을 의미한다. 세상의 희망보다 더 희망적인 절망이다. 그 희망은 세상의 무덤, 현세의 경계 너머 하나님께 향한다. 주께서 그의 모든 것을 잃게 하신 것은, 이제는 세상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참된 만족과 기쁨,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의 샘이신 하늘 아버지께 마음의 시선을 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욥에게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다시 붙잡으라 권했다. 하나님은 욥이 그런 친구들보다 정당하다고 판정하셨다. 결국 욥의 절망과 죽음의 수용은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상에 대한 절망과 죽음을 이루어 주시고 부활과 영생의 길을 보여주셨다. 오늘 나는 무엇에 절망하며 무엇을 희망하는가? 과연 나는 일시적이며 만족할 수도 없는 돈, 명성, 육신의 쾌락이 아니라 영생과 진리의 길이신 주님을 따라 하늘 아버지께 닿는 그 안식과 기쁨을 희망하는가?

 

거룩하신 주 하나님, 보이는 세상보다 무한히 크고 영원하고 좋은 하나님의 집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생과 진리의 나라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며 결국 택하신 자녀들에게 성취될 것도 믿습니다. 욥처럼 우리 마음의 시선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기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시며 영생의 구원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믿음과 소망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에 대한 죽음을 고백합니다. 거듭난 생명으로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남은 삶을 통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늘의 거룩한 영광을 보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