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의 빗나간 확신...(욥22:1-20)
엘리바스의 빗나간 확신...(욥22:1-20)
세 번째 변론을 시작한다. 엘리바스는 욥의 악행을 확신한다. 욥이 받은 재앙이 천벌이라는 생각이 신념이 되었다. 욥이 하지도 않은 악행을 소설 쓰듯 나열한다. 이유 없이 형제들에게 담보를 요구했고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들을 학대했다고 믿는다. 친구인 욥이 악인이라고 확신한다. 왜 그는 이런 확증 편향에 빠지게 되었을까?
입증되지 않은 일을 그는 사실로 확신하며 욥을 정죄한다. 자기 생각과 느낌, 판단을 믿는 무지하고 오만한 신념 때문이다. 사실 그는 욥의 신앙과 삶에 대해 모른다. 보이는 현상과 말로 그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믿는다. 사실 우리도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 주체성, 자기 생각과 느낌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친구들에게 분노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지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며 연합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초의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선악을 판단하고 책임지며 스스로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구하는 삶을 선택했다. 창조주의 통치 아래 말씀과 평강, 기쁨을 공급 받아야할 피조물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욥은 믿음으로 창조주의 절대 주권을 수용했다. 그런 욥을 친구들은 자신들의 율법적 시스템을 따르지 않는 악인이라며 책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생과 진리의 길은 사람이 스스로 개척할 수 없는 것이다. 유일한 길과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만 가능하다. 과연 오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욥의 친구들처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세상과 자기 생각 안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신자라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와 기쁨, 소통이 있어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흘러나오며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이 우리 육신의 삶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사랑의 하나님, 허락하신 자유를 오해하고 자기 주체성을 고집하며 죄와 죽음의 길을 택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부패한 세상에 매몰된 죄인의 길을 떠나 영생과 진리, 참 평강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늘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며 아버지의 주권과 뜻 아래 남은 육신의 날들을 채우기 원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