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선의로 시작한 국가적 캠페인의 실패(대상13:9-14)

되어지는대로 2026. 9. 23. 05:01

선의로 시작한 국가적 캠페인의 실패(대상13:9-14)

 

  선민들의 관심에서 버려져 있던 법궤를 다시 믿음의 즁심으로 세우기 위해 전국적 캠페인을 일으켰다. 다윗 왕이 온 백성의 관심과 응원 속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다. 소들이 끄는 새 수레에 실었다. 웃사가 수레를 끈다. 기돈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날뛰며 수레가 크게 흔들렸다. 웃사가 손을 뻗어 법궤를 붙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즉사하게 하셨다. 축제는 끝났다. 주께서 찬물을 끼얹으신 것이다. 다윗은 두려워했다.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지 못했다.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보낸다. 선한 뜻으로 시작한 이 행사가 왜 실패했을까? 단지 법궤에 관한 율법, 곧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는 모세의 법을 어겼기 때문일까?

 

  타작마당은 돌이 없는 평탄한 땅이다. 소들이 그곳에서 동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렇게 하신 것이다. 믿음의 내용이 없는 그들의 축제에 분노하신 것이다. 웃사는 자신도 모르게 법궤에 손을 대고 재앙을 당했다. 사실 그가 온 이스라엘의 죄를 대표하며 죽임당한 것이 아닐까? 법궤는 살아계시며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한다. 그 법궤에 대한 태도는 선민의 선민 됨을 드러내는 표지와도 같다. 믿음은 하나님의 이름, 그 거룩하심에 대한 태도의 여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법궤를 승리를 위한 주술적 도구로 삼아 전쟁터로 가져갔었다. 대패했다. 법궤도 빼앗겼다. 블레셋은 법궤를 전리품으로 그들의 신전에 두었다. 신상의 목이 부러졌다. 사람들이 연이어 재앙을 당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낸다. 법궤는 70여 년을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선민들의 관심과 사랑에서 버려진 것이다. 다윗이 거룩한 공동체의 믿음을 위해 법궤를 모셔오기로 했다. 그러나 행사에 치중했다. 말씀에 관한 바른 지식이 없었다. 율법에 무지했다. 모든 백성이 그랬다. 마음의 눈이 주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 육신의 눈으로 법궤만 보았다. 세상의 방법, 곧 눈에 보기 좋고 편한 대로 소들이 끄는 새 수레에 싣고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가려 했다. 교만하고 무지하며 무례한 것이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수레가 되고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가? 법궤는 우리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 안에는 오직 주의 이름만이 거룩히 모셔져야 한다. 그의 말씀과 뜻으로 움직이고 또 멈춘다. 사람의 뜻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세도 법궤를 그런 식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이익과 영광을 위해 동원하는 기복적, 주술적 믿음의 도구로 여긴 것이다. 십자가 목걸이를 매고 금식기도 등 어떤 캠페인을 해도, 마음의 눈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의 중심에 그 이름을 거룩히 모시지 않는다면 오히려 가증하게 여기실 것이다. 여전히 돈, 권세, 명성 등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가치를 아깝게 여기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이 마음에서 최고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일등의 자리에 있지 않는다면 그런 진노와 재앙은 계속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 그 별세와 부활의 길에 마음을 드린다. 주님 안에서 우리 마음도 거듭나기를, 그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그 통치와 그 뜻이 온전히 성취되기를 기도한다.

 

  거룩하신 주 하나님, 사람이 자기 주체성을 내세우며 자기 판단을 고집한다면 만유의 주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것입니다. 다윗조차 선한 일이라 여기며 말씀을 소홀히 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신 이유도 우리가 본질상 죄와 저주의 자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 은혜 가운데 우리 마음도 주님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에 닿기 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소서.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영원히 사랑하며 기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