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 왕, 그 믿음의 한계(왕상15:9-24)
르호보암의 손자 아사가 유다의 왕이 되었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다. 남창을 쫓아내고 우상을 없애버렸다. 어머니를 대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어머니가 세운 아세라 상을 찍어서 불태웠다. 산당을 없애지는 않았으나 주 앞에서 온전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기록은 이상하다. 그는 북 왕국의 침략 앞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아람 왕에게 돈을 주고 도움을 청했다. 발에 병이 났을 때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는 온전한 믿음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 선민으로서, 또 왕으로서 임무를 정직하게 수행했다. 믿음의 양심을 회복한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자기 어머니를 대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온전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거기까지인 것 같다. 혼합주의 신앙의 산당을 없애지는 못했다. 더구나 바아사 왕의 침략을 당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지 않았다. 적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라마까지 쳐들어와 진지를 구축할 때 그는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을 잊은 것 같다. 아람 왕에게 돈을 주며 구원을 청했다. 이 일로 그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다. 발에 병이 났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의사를 먼저 찾았다. 물론 의사를 찾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 이런 것은 그가 하나님을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권능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는 하나님보다 먼저 세상의 방법을 찾고 구했다. 이론으로, 생각으로는 믿지만 삶의 현장에서 생활화하는 믿음은 아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닐까? 정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예수처럼 항상 실시간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생각을 받아 온전히 행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그렇게 깊은 친밀감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구원은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로 감사하며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런 삶은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별세와 부활의 길을 따라 마음을 드릴 때 드러날 것이다. 성령의 보호와 인도 아래 믿는 자의 특권도 누릴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으로, 깊은 친밀감과 그리움 가운데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타락한 땅의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영생의 구원으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믿음의 길로 이끄셨으니 이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소망하고 사랑하며 가까이 나아가기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소리보다 먼저 영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충만한 사랑과 기쁨으로 그 뜻을 이루며 은혜를 나누게 하소서.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봅니다. 오늘도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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