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는다(옵1:15-21)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에돔은 망하고 유다는 회복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 곧 만국을 심판하시는 날에 야곱 족속에는 피할 자가 있으나 에서 족속에는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다. 이삭의 두 아들 중 야곱의 후손이 구원을 받는다. 구약은 선민을 육체의 혈통을 따라 야곱 족속이라 부른다. 그러나 예수 이후 성령의 시대에 그 말씀의 참 뜻이 밝혀졌다. 육의 혈통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을 의미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일까?
주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다. 그러나 누가 진실로 택하신 자인지는 알 수 없다. 바울이 교회를 박해할 때 누구도 그가 장차 사도로 쓰임 받을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우리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스스로 점검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선민이라면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을까?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보좌 우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름다운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까? 성경 말씀이 달게 느껴지며 하늘의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깊은 사랑과 기쁨에 자신도 동참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 밖에 있는 하나님과 천국을 향한 그리움도 있을 것이다.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나 머리 둘 곳 없이 살다가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신 이유를, 또한 산상 수훈을 비롯한 과격하고 충격적인 말씀들이 진실로 생명과 진리의 가르침임을 알게 되고 또한 믿어질 것이다. 그 마음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평강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물론 저주받은 땅에서 타락한 몸으로 살기에 시험, 유혹의 충동은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곧 십자가의 주님을 떠올리며 그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올 것이다. 더 이상 보이는 세상과 육신의 일과 관계에서 기쁨과 만족을 구하지 않으며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소망을 둘 것이다. 늘 하늘의 아버지를 의식하며 거듭난 언어 체계와 행동으로 그 믿음을 드러낼 것이다. 택하신 자는 세상의 어떤 조건, 즉 파산하고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으로 당당할 것이다. 그 마음에는 주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깨우치며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과연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 곧 그의 믿음을 본받는 선민답게 살고 있을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성경의 일관된 명령이다. 세상과 육신의 것을 사랑하며 마음을 쏟지 말라는 것이다. 집착도 미련도 버리고, 오직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뻐하는 삶이다. 그래야 주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 양 예수의 상번제, 곧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생활화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가능할 것이다. 오늘도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소원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한다.
구원의 주 하나님, 믿음으로 마음을 드리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를 찬양합니다. 전에는 감추어져 알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과 구원의 뜻을 확증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 성도에게 허락하신 십자가의 복음과 은혜의 길을 바라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밝히 보기 원합니다. 미혹과 시험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그 영광을 찬양하게 하소서.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공부와 큐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과 사람 왕 사이에서(왕하1:9-18) (0) | 2024.06.20 |
---|---|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왕하1:1-9) (0) | 2024.06.19 |
우리는 망했다, 저들은 왜 편안한가(옵1:1-14) (0) | 2024.06.17 |
개와 돼지의 믿음도 있다(벧후2:12-22) (0) | 2024.06.14 |
거짓 선생들은 항상 있다(벧후2:1-11) (0) | 2024.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