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가 깨닫지 못했다?(눅2:41-52)
12세 되던 해, 예수는 친인척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유월절을 지내고 돌아오다가 부모는 예수가 따라오지 않은 것을 알았다. 사흘 후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하는 그를 찾았다. 마리아가 책망한다. “애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우리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 예수가 답한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그녀는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무엇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
‘내 아버지의 집’의 원문에는 집이라는 단어가 없다. 원문은 ‘그것들, 혹은 일들’이란 의미의 헬라어다. 그래서 흠정역은 ‘내 아버지의 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어머니가 ‘왜 네 마음대로 행동했느냐’고 묻자, ‘왜 걱정하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을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답한 것이다. 나는 내 자의로 여기 남아서 랍비들과 율법에 관해 토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오직 하늘 아버지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 말한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가 성전에 남아 당대 석학들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인 것을 몰랐다. 그리고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 순종하며 지냈다. 물론 그것도 부모에게 순종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이다. 이처럼 공생애 전의 사생애에서도,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항상 그 마음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사신 것이다. 신자들도 이런 자세로 삶의 현장을 살아내야 한다는 의미로 누가는 특별히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믿음의 자녀들은 이처럼 자기 일로 세상을 살지 않는다. 세상에서 하는 일이 모두 아버지의 일이라는 자기 인식으로 살아간다. 자의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그 일을 통해 순종하는 삶인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의 것이며 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모든 순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하는가?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이 이르기를,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죄와 죽음의 길을 따르는 비천한 자녀들에게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 순종의 본을 보이시며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영광으로 인도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주권과 뜻 아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으로 선하신 뜻을 거역하는 죄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도 말씀과 성령의 보호와 인도 아래 아버지의 원하시는 길을 따르기 원합니다,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허락하소서, 강건하게 하소서, 담대한 믿음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며 이 땅의 남은 삶을 통해 그 뜻을 이루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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