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논쟁의 시작(행15:1-11)
유대인 신자들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말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방인 신자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바울이 그들과 논쟁했다. 그들은 수긍하지 않는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내친다고 모세의 율법서에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다. 사도와 신자들이 모였다. 쌍방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특히 바리새파 출신의 신자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할례의 율법은 폐기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선민에게 할례의 의미는 소중하며 필수적이다. 단지 육신의 표면적 할례에서 마음의 할례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마음의 할례가 본래 그 취지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할례는 하나님 나라 백성, 즉 선민의 표시이며 증거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선민도 전능하신 주 앞에서 행하라 하신 명령을 지키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할례받은 자의 마음가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할례의 의식으로 사는 예가 다윗과 골리앗 사건이다. 이스라엘의 왕과 군대가 장대한 골리앗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다윗은 달랐다. 늘 할례의식으로 투철했다. 먼저 자신이 전능하신 주 앞에 서 있는 사실을 믿는다. 그는 골리앗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더 큰 현실감으로 느낀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따랐다. 주의 이름으로 나가 골리앗과 싸운 그가 진실로 할례받은 자였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드러내셨다. 이처럼 할례는 마음에 하며 실제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는다. 그것은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늘 아버지께 대해서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여전히 오래된 문자와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말로 하는 교리 논쟁 보다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믿음과 소망, 사랑의 열매들이 중요하지 않은가?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 눈과 귀를 열어주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 선하심을 지금 나의 현실로 느낄 수 있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죄와 사망의 육체에 갇힌 인생은 영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해 만나는 세상 외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3차원 세상의 커튼이 제껴지면 영생과 진리의 세계가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은 오직 믿음과 소망으로 실상을 알며 그 증거를 얻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영생의 문을 열도록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허락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동선을 따라 우리의 마음도 육신을 벗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르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깨우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그 나라와 그 뜻이 이 땅에도 임하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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