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한 예수의 놀람과 두려움(막14:32-42)
잡히던 밤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시다. 3일 후 부활할 것도 아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놀라며 두려워하실까?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유를 생각한다.
그와 전혀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스테반은 본래 죄와 저주에 속한 사람이었다. 십자가의 예수로 인해 마음이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영생과 진리의 구원을 경험한다. 그러나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천국에서 오셨다. 이제 아버지로부터 분리되고 저주 속에 던져짐을 느낀다. 택하신 자녀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늘 아버지와 연결된 상태로 그 사랑과 기쁨 안에 있던 그에게는 경악할 일이다.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비록 3일이지만 아버지부터 분리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다. 사람들은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사랑, 그 있음과 좋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모른다. 그들은 폭풍의 바다에서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예수는 깊은 잠이 드셨다. 이번에 제자들은 피곤에 지쳐서 잠이 든다. 그러나 예수는 두려워서 죽을 지경이다. 극심한 심리적 고통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죄와 죽음의 저주에 갇힌 현실과 다가오는 종말을 모르고 편안히 살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제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겪으며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와 천국의 실재를 깨닫게 된다. 그 거룩한 이름을, 그 사랑과 은혜의 능력을 실감하게 된다. 천국 구원의 놀라운 영광을 본 그들은 육신의 환경과 처지에 구애받지 않는 평강과 기쁨을 체험한다. 세상의 어떤 환란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소명을 감당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쁨, 쉬지 않는 기도, 범사의 감사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남은 지상의 삶을 살아간다. 저주에 갇힌 자녀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지신 주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고백하며 온 마음을 드리는 자들이 그런 성도들이 아닌가? 과연 나는 복음의 능력을, 하늘 아버지의 실재하심과 좋으심, 그 주권을 실감하며 구원을 이루고 있는가? 내 안의 깊은 죄와 저주에 놀라며 두려워하는가?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 성령의 내주와 교통하심을 누리며 오늘을 사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저주받은 세상 나라를 탈출하여 아버지의 나라에 오르는 길로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죄와 저주의 세상과 육신에 젖은 우리는 여전히 시험에 걸리며 십자가의 길을 벗어나 옛사람의 길로 돌아가곤 합니다. 연약한 육신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의 사랑에 응하지 못하는 신자의 원한을 풀어주시고 영생과 진리의 길에 온전히 오르게 하소서. 구원의 날에 흰옷을 입고 찬양하는 무리에 들게 하소서. 저주에서 벗어나 천국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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