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쌓기와 일용할 양식(느5장)
페르시아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을 세운다. 그 사건을 성경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주받은 땅에서 거룩한 삶을 이어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창조주 하나님과 소통하며 말씀으로 마음을 채워야 가능하다. 마음에 영적인 벽을 세워 부패한 세상과의 구별됨을 유지해야 한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통해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다면 그는 하늘에 속한 자녀가 아니다. 세상의 자녀일 뿐이다. 벽 쌓는 자에게 세상은 분노하며 방해할 것이다. 느헤미야와 함께 그들은 필사의 각오로 대응했다. 그러나 선민으로서 신앙 공동체인 그들 내부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불평과 원망이 드러난다. 빈부의 차이, 일용할 양식 등 경제 문제였다. 영적인 일과 육신의 문제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응을 생각한다.
영적인 벽 쌓기는 세상의 유혹과 협박, 조롱 등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좋음과 싫음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늘의 주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그 나라와 그 뜻을 위해 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몸으로 세상을 산다. 돈, 건강, 자녀 문제 등 하늘로 향하는 마음을 삼키려는 시험이 계속된다. 마음은 육신에 연관된 자기를 부인하고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 뜻을 이루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다. 사실 하늘의 영원한 사랑과 기쁨에 참여하는 선민은 세상으로부터 육신의 만족과 기쁨을 구할 필요가 없다. 일용할 양식은 필요하다. 몸이 살아야 선한 일도 하며 그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도 오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다. 물론 양식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다. 거룩히 살아있는 몸으로 오직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선민 공동체의 생계가 달린 문제 앞에서 부자와 관리들을 소집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종으로 삼은 자들을 풀어주라 명했다. 자신도 솔선수범했다.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받는 봉급을 모두 내어놓으며 섬겼다. 그들을 위해 그리고 함께 성벽을 완성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는 세상의 재물 등으로 기쁨과 만족을 구하지 않았다. 돈을 위해 살지 않았다. 주의 나라와 뜻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섬겼다. 주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다. 오직 하늘의 주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기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창조주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기뻐하는 본래 사람의 인생이 아닐까? 예수께서도 그렇게 모든 것을 바치는 본을 보여주셨다. 입으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속으로는 돈, 명성 등을 사랑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하셨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마음을 쏟으며 무엇으로 기뻐하는가? 하늘 아버지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라면, 그리고 소명을 받았다면 느헤미야처럼 마음과 몸을 다 드려야 하지 않는가?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곧 별세와 부활의 길을 열어 보여주셨다.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이 오르신 하늘의 사랑과 그 영광, 그 뜻을 생각하며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녀로 받으시며 영생과 진리의 자리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어떤 이름보다도 아버지의 이름이 가장 거룩하며 사랑하며 기뻐하는 이름이기를, 그 나라가 삶의 현장에 임하며 그 뜻이 온전히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삶을 위해 오늘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고 헛된 욕심과 집착, 두려움을 버리게 하소서,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짓는 죄를 용서하소서, 오늘도 믿음의 자녀들이 세상과 육신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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