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느3:15-32)
성벽 재건을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 등 많은 사람이 자원했다. 능력이 있는 자들은 큰 구획을 맡았다. 각자 형편에 따라 성벽을 복구했다. 그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금세공인들, 상인들의 이름도 있다. 그 이름들을 기록하는 의미를 생각한다.
선민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재건에 동참했다. 그것이 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또한 그들 모두를 위해 옳은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일에는 목적이 있고 지도자가 필요하다. 좋은 목적과 지도자가 있어도 현실은 항상 어렵다. 반대 이론을 고집하며 거부하는 세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 사람을 인격체로 지으셨고 그 뜻을 존중하며 그 마음을 살피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공의의 주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주를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선하신 뜻에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아담 이후 사탄의 미혹과 저주에 걸린 인류는 부패했다. 땅도 저주를 받았고 혼돈과 공허 속에 세상은 타락했다. 하늘의 주 하나님을 잊고 육신의 이익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특별히 선민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 말씀을 받았다. 은혜의 구원을 경험했다. 그러나 믿음의 순종과 거룩한 삶에는 실패했다. 나라를 잃고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었다. 좌절과 절망의 삶이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조상의 땅에 돌아왔으나 먹고 살기에 급급했다. 다시 은혜가 임한다. 회복의 기회가 주어졌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회복한다. 자원하며 각자 형편에 따라 가까운 곳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한다.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하며 주의 뜻, 거룩한 예루살렘 성의 재건에 참여하는 이름이기에 하나님께도 그 이름이 귀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는 어떤 정체성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며 사는가? 하늘나라 자녀의 정체성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그 뜻을 과연 의식하며 사는가? 마음의 벽 쌓기를 포기하고 세상의 문화와 풍조를 받아들이며 그저 육신의 기쁨으로 만족하지는 않는가? 죄와 죽음의 저주, 악한 미혹과 선동 등 부패한 소리를 차단하는 마음의 벽이 없다면 구원받은 자녀의 믿음이라 할 수 없다. 구약의 보이는 성벽과 성전은 그 용도가 끝났다. 우상이 된 것들은 사라졌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가 이 시대 우리의 참 성전이며 거룩한 성이시다.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께 마음을 드리며 그 별세와 부활의 길을 따라 하늘의 아버지께 우리 마음도 오르기를, 몸으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가까운 영역부터 소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과 공의의 주 하나님, 말씀을 떠난 세상은 여전히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자기를 주장하며 저주의 길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 본 자들은 마음이 하늘을 향하며 영광의 주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새 언약의 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 하늘의 아버지께 이르는 구원의 통로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마음에 거룩한 벽을 쌓으며 주님을 따라 아버지의 나라와 그 뜻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하소서. 시험에 걸려 실족하지 않으며, 다만 악에서 건짐을 얻으며 찬양하게 하소서. 하늘의 영광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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