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고 쇠약해지는 것이 왜 두려운가(시71:1-13)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으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합니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같이 되었으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이시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합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고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원수들이 내게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으니 그를 쫓아가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다.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택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왜 늙고 쇠약할 때 버림당할 것을 염려할까?
모태로부터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그는 믿는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전지전능하시다.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시다. 늙고 약해졌다고 버리실 분이 아니다. 그렇게 좋으신 주 하나님을 항상 찬송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쇠약해진다. 병이 들고 무능해질 수 있다. 원수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비방하며 조롱한다. 공격한다. 아마 그는 원수들과 쇠약한 자기를 바라보며 낙심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사랑하시는 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린다는 생각 자체가 불신앙이 아닌가? 그런 걱정과 두려움은 실족의 위기가 아닐까? 삶의 고난이 범죄나 버림당한 증거는 아니다. 연단, 혹은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시인은 부패한 세상과 연약한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육체로 세상을 사는 인류의 슬픈 현실일 것이다. 누구도 죄와 저주에 갇힌 현실, 연약한 육신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아담의 죄로 땅도 저주를 받았다. 모두가 죄와 저주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므로 마음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돌리며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에서 주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한다.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런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적 현실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마음이 하늘에 이른다면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터져 나올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 세상과 나의 삼각관계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과 육체를 바라보며 그것을 자기 현실로 붙잡는 삶은 믿음이 아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죄의 중력과 관성, 습관을 따라 사는 것일 뿐이다. 육체의 현실과 믿음의 영적 현실은 모두 사실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보고 계시며 선하신 계획과 뜻으로 사랑하시며 에덴으로 이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를 땅에 보내 그리스도 연쇄 과정, 곧 별세와 부활과 승천의 하늘길에 연합하라고 자녀들을 부르셨다. 죽음의 저주에서 건지시며 영생과 진리의 구원을 받으라 하신다. 그 사실, 복음을 정말 나의 현실로 믿는다면 노쇠를,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오늘도 모든 걱정, 불안 등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합리적인 믿음으로 기쁨과 기도, 감사로 채우는 날이 되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주받은 땅에 매인 인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자녀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마음이 세상과 육체에 갇히지 않기 위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고난과 시험의 순간마다 여전히 믿음을 놓치고 육체로 돌아갑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하며 돌이키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마음에 거룩히 여기며 자녀 됨을 놓치지 않으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소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아버지를 불신하는 악에서 구하소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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