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그들의 슬픔과 다른 예수의 비통함(요11:36-44)

되어지는대로 2025. 2. 10. 06:14

그들의 슬픔과 다른 예수의 비통함(11:36-4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다. 이미 나사로를 장사하고 4일이 지났다. 많은 사람이 그를 애도하며 슬퍼한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울고 있다. 그들을 보시며 비통해하신다. 슬픔의 이유가 그들과 다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비통해하신 이유는 나사로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 애도하는 그들을 보고 격분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한다. 육체의 죽음을 최악의 상실로 여긴다. 세상을 전부 잃었으며 생명도 기쁨도 상실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유일하게 하늘, 곧 천국에 계시다가 땅에 오신 예수님의 관점은 다르다. 몸의 죽음은 상실이 아니다. 창조주로 말미암아 세상에 있게 되고 만나게 된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슬퍼할 일이 아니다. 주 하나님을 믿고 그 부르심을 따르는 성도에게 몸의 죽음은 군대나 학교 등 의무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것과 같이 고난의 세상을 벗어나 천국에 오르는 기쁜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선민인 유대인들, 사랑하시는 마리아 등이 나사로의 몸의 죽음을 그토록 슬퍼하는 것에 주님은 배반감을 느끼며 격분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이 전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본문의 원어는 격렬히 분통을 터뜨리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선민들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육체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신 것이다. 나사로 사건은 단순히 그 권능을 드러내는 표적이 아니다. 이 일을 통해 대제사장 등 공회가 주님을 죽이기로 정하고 모의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십자가 연쇄 사건, 곧 당신의 양들이 들어갈 구원의 문을 여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드러내시는 표적이다. 이제 그를 믿는 성도들은 양의 문이신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며 세상에 대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거듭남, 곧 부활과 영생의 길에 오를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며 더는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생의 나라,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 곧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비통해할 것이다.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그것을 깨우치시는 표적이다. 그러나 이 시대 잘 믿는다는 신자들마저도 여전히 몸의 죽음을 슬퍼하며 두려워하지 않는가? 죽은 자만 불쌍하다느니,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 있는 게 낫다는 둥 주님이 격분하실 말들을 하지 않는가? 그런 말은 보이는 세상과 육체에 여전히 집착하며 하나님과 천국의 있음과 좋음을, 영생과 진리의 구원과 그 능력을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나는 믿음 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기쁨을, 그리고 세상과 육체에 마음이 묶여 있는 진짜 슬픔과 비통함을 느끼는가?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께 온 마음을 드리며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로 반응하며 소망하는 천국 자녀로 살기를 소원한다.

 

  영생과 진리의 주 하나님, 본래 사람은 에덴에서 생명 나무 열매를 먹으며 영생을 누리도록 지으셨습니다. 미혹에 빠져 주를 등지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택하며 에덴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죄와 죽음의 저주에 갇힌 인생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믿고 집착과 두려움, 슬픔 속에 살아갑니다. 주의 사랑과 은혜로 영생의 구원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거듭난 자로 하늘에 마음이 이르기 원합니다. 하늘 아버지와 천국, 그 실재와 영광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영생에 이르는 믿음의 여정을 온전히 따르게 하소서. 존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