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뼈가 꺾이지 않은 그의 죽음, 무덤(요19:31-42)

되어지는대로 2025. 3. 10. 06:15

뼈가 꺾이지 않은 그의 죽음, 무덤(19:31-42)

 

   안식일 준비일이라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리려 했다. 강도들은 다리를 꺾어 질식해 죽게 했다. 예수는 이미 숨을 거두셨다. 군인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죽음을 확인했다. 무덤에 장사했다.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언급, 그리고 그 죽음과 무덤의 의미를 생각한다

 

   뼈에 대한 언급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상기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양을 먹고 애굽의 노예에서 탈출했다. 집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으며 뼈를 꺾지 말아야 했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라는 뜻이다. 선민이라면 출애굽의 이스라엘처럼 출세상을 위해 십자가 예수의 죽음을 먹어야 한다. 집 밖의 이방인들은 먹을 수 없다. 집 안의 선민이라도 그 죽음을 먹지 않으면 죄와 저주의 세상에서 탈출할 수 없다. 세상이 혐오하며 기피하는 골고다(해골) 언덕에 그 십자가가 세워졌다. 세상 존재감에 압도되며 육신의 좋음을 추구하던 자아가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육의 자아가 죽고 무덤에 장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뼈가 꺾이지 않고 부서지지 않았다. 예언된 부활에 이르는 죽음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골고다의 그 십자가는 참혹한 실패의 자리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하늘의 관점에서 십자가는 사망과 멸망을 이긴 성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통해 하나님이 계신 천국과 연결된 부활의 나라가 임하고 죄와 죽음의 저주에 갇힌 자들이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다. 잘나가는 사람들, 성공과 형통한 삶을 꿈꾸는 자들은 세상의 가장 변두리이며 낮은 십자가의 자리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탈출해 영생의 나라에 진입할 수 있는 좁은 문은 세상의 끝인 그 십자가에 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자기 주체성을 고집하는 자는 십자가 예수의 죽음을 먹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인정하지 않으며, 세상과 육신의 영광과 그 미련을 버릴 수 없다. 그들은 세상과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나라에 속한 선민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이 닿을 수 없다. 영원한 사랑과 기쁨, 생명과 진리의 교제에 참여하며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며 세상에 대해 철저히 죽고 무덤에 묻혀야 가능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희망이 있다. 공회원이며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신분과 소유에 구애받지 않고 무덤을 준비하며 주님을 장사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어린양 예수의 죽음에 연합하며 세상과 육신의 영광에 대해 죽은 자로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품고 있는가? 그 십자가 죽음과 무덤을 생활의 현장에서 나의 것으로 적용하며 오직 믿음과 소망으로, 은혜로 사는가? 오늘도 죄와 저주에 찌든 자아가 죽고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획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사랑과 은혜의 주 하나님,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는 죄 사함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드러내며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살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후에도 미련 없이 천국으로 돌아가신 주님, 그리고 세상의 좋음을 버리고 헌신한 제자들의 삶이 천국의 좋음을, 세상의 악함과 헛됨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세상에 마음을 두고 육신의 소원에 매여 살아갑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마음에도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도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며, 그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 집착하며 아버지의 뜻을 빗나가는 죄악에서 구원하소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