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그들이 시도한 세상의 일은 실패했다(요21:1-14)

되어지는대로 2025. 3. 14. 06:34

그들이 시도한 세상의 일은 실패했다(21:1-14)

 

  부활 후 제자들과의 세 번째 만남이다. 부활하고 40일 후 주님은 승천하셨다. 그 마지막 40일을 제자들과 늘 함께하지 않으셨다. 간헐적으로 잠깐 보이고 사라지셨다. 왜 그러셨을까? 제자들은 절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도 잠시였다. 평강을 주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지만,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이 아는 공생애의 주님이 아니었다. 그저 어렵기만 했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막막했다. 베드로가 전의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가려 했다. 주님과의 관계를 다 잊고,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며 익숙한 세상일을 시도했다. 그러나 주님이 막으셨다. 성도가 따라야 할 믿음의 삶을 생각한다.

 

  주님은 40일간 어디에 계셨을까? 부활의 나라에 계셨다. 제자들은 세상에 있다. 서로 차원이 다른 세계에 있다. 부활의 나라는 천국에 접해 있다. 주님을 통해 세상과도 접해 있다. 주님은 세상에 머물지 않으신다. 이제 공생애의 주님은 세상에 없다. 주님은 다시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타락한 세상은 천국에 비하면 지극히 나쁜 곳이다.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가 계신 천국으로 돌아가려 하셨을 것이다.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세상 나라에 갇힌 제자들의 마음을 부활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다. 베드로가 다시 세상의 일로 돌아가려 했다. 잘못된 시도였다.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아침에 해변의 어떤 분이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 지시했다. 놀랍게도 고기가 153마리나 잡혔다. 주님이심을 안 베드로는 고기를 버려두고 물에 뛰어들었다. 급히 헤엄쳐 해변의 주님께 갔다. 그렇게 그는 주님을 사랑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고기와 떡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사건은 부름받은 성도는 스스로의 판단과 계획으로 일하지 않고 오직 받은 지시를 따라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먹고 사는 일도 주님이 준비하며 사명으로 이끌어 가신다. 아마 이것이 베드로가 스스로 행한 세상일의 마지막 시도였을 것이다. 이제 그는 스스로 판단하며 계획하는 세상일을 버리고 부활의 나라에 속한 제자의 길을 작정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153의 숫자를 좋아하며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 아닐까? 그 숫자는 그것이 실제 일어난 사건이며 주님의 지시를 무조건 따른 결과를 상징한다. 만나처럼 당시 제자들과 가족들의 필요를 채우는 숫자였을 것이다. 그들도 잡은 고기에 집착하지 않고 주님을 따랐다.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까지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었다. 승천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도 세상을 떠나 하늘로 향했을 것이다. 그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지시에 따라 간절히 성령을 구했다. 결국 그들은 성령 충만과 영적 은사를 체험한다. 마음이 부활의 나라에 접속하며 사명을 이루는 참된 제자의 삶을 시작한다. 과연 오늘 우리는 부활의 나라에 마음을 두며 성령을 구하는가? 주님의 십자가가 그 나라의 입구이다. 그 문을 넘어야 영의 세계에 접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누가 그 십자가의 좁은 문을 바라보며 들어가려 할까?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깨우치는 성도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은혜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가르치신 대로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며 그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 땅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부패한 세상, 육신의 환경과 조건에 마음을 빼앗기며 구원의 믿음과 소망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십자가의 주님을 항상 의식하며 부활의 나라에 마음이 오르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며 그 영광을 찬양하게 하소서,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