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궤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삼상6:19-21)

되어지는대로 2023. 2. 2. 06:01

궤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삼상6:19-21)

 

   빼앗겼던 궤가 선민들에게 돌아왔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뻐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70명을 죽이셨다. 궤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슬퍼한다. 두려움 속에 궤를 다른 곳으로 보낸다. 그들의 실패를 생각한다.

 

   블레셋은 궤가 살아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이 진짜 신이신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섬기는 다곤이 죽은 우상인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섬기려 하지 않았다(라합, 룻처럼 믿는 이방인도 있다). 살아있는 신이 싫은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생각과 주장이 있는 신을 싫어한다. 자기 생각과 의지를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벧세메스 사람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이 패하게 하셨을까? 믿는 자기들에게 왜 극심한 고통을 주셨을까? 하나님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를 경외하는 선민의 태도가 아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거룩히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먼저 자기 속을 살펴야 했다. 자기 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문제시하며 불행의 원인을 돌리려 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자신의 죄를 보지 않은 것이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고통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지 않고 외부에서, 결국은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않는가? 그들은 궤 앞에서 제사를 드렸다. 번제물을 태우며 피조물인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제사는 형식적인 행사였을 뿐이다. 번제를 드리지만 그 의미를 잊었다. 그러므로 감히 궤의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는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우러러보아야 할 대상이지 들여다보며 구경할 대상이 아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그 이름의 참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주 앞에서 나의 실상, 즉 죄와 죽음을 의식하는가? 십자가의 그 의미를 잊고 창조주를 내가 판단하려는 것은 아닐까? 궤를 다른 곳으로 보낸 그들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은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자아가 죽은 자는 감사함으로 주를 경외하며 찬양한다. 오늘도 주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히 여겨지며, 그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마음 중심에서 거룩히 여겨지며 그 나라와 주권이 우리 모든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며 하늘에서 세우신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우리 가운데에서도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부패한 세상과 육체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아버지를 떠나는 악에서 구원하소서. 오늘도 거룩한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구원을 이루기 원합니다, 하늘 자녀의 길을 걸으며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