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과 혼돈의 나라, 하나님의 주권(삼하20:14-26)
압살롬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다윗의 왕권은 불안하다. 민심은 어지럽고 지파들의 갈등도 여전하다. 또 반란이 일어났다. 다윗은 아마사를 사령관으로 삼아 진압하려 한다. 그러나 요압이 그를 죽인다. 군을 장악하고 스스로 사령관이 되었다. 반역자 세바가 숨은 아벨성을 포위했다. 한 여인이 나서서 요압과 협상한다. 세바를 내어주고 성을 구한다. 여인의 지혜가 돋보인다. 다윗은 무력한 왕이다. 요압은 왕명에 불복하며 살인을 일삼는다. 한 여인이 요압의 살상을 막는다. 성경이 드러내는 세상을 생각한다.
다윗 시대 이스라엘은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나라의 내부에는 갈등과 반역이 횡행했다. 요압은 왕명을 수차례나 어기고 살인을 저질렀다.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벌하지 못한다. 이미 권위를 상실했다. 우리야를 죽이라고 그에게 명한 과거의 죄가 있기 때문이다. 요압과 동생 아비새가 군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파들간의 화합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솔로몬 이후 왕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다. 다윗은 외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번영을 이룬 성군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부하도, 지파들도 뜻대로 통솔하지 못했다. 나라를 구했어도 아들은, 개인은 구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지혜로운 한 여인을 들어서 아벨이 초토화되는 것을 막으셨다. 그러나 왕 다윗의 추락은 막지 않으셨다.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닐까? 선민이 스스로 선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구약 성경은 예수의 그리스도 사역, 즉 구원을 위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필요성과 함께 그 유일한 관문으로 선민들을 몰아간다. 진정한 선민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단 한 분이시다. 그 별세의 십자가에 연합하므로 죄와 사망의 땅에서 우리는 영생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물론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세상 최고의 복을 상징하는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평안하다. 현실은 무능과 고난, 아픔의 연속이지만 마음은 시편 23편처럼 푸른 초장의 양과도 같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여정도 그렇지 않을까?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혼돈과 공허, 어둠의 땅을 견디며 구원의 하늘길, 그 소망에 이르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구원은 언약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성령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연결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과 영원한 주권을 언제 어디서나 의식하며 믿음을 유지할 때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대면하며 평강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위로부터 거듭난 자녀의 믿음으로 위의 것을 생각하며 땅에서부터 영생을 살기 원합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감사와 기쁨과 기도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의 지혜를 받아 뜻을 이루며 그 영광을 보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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