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왜 엘리야는 절망했을까(왕상19:1-10)

되어지는대로 2024. 5. 20. 06:23

왜 엘리야는 절망했을까(왕상19:1-10)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권능이 나타났다. 빗속에서 왕의 마차보다 빨리 달리며 주께서 함께하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이세벨의 저주를 듣고 낙심한다. 왜 낙심했을까? 갈멜산의 대결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세벨의 저주와 협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항상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두려워한다. 도망간다. 죽음을 원한다. 위풍당당했던 그가 왜 그렇게 절망했을까? 주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의심하는 것일까? 선지자 엘리야에게 나타난 좌절과 절망의 이유를 생각한다.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여호와여,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니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저는 저의 조상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그의 마음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 갈멜산 승리로 그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기뻤다.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았다. 그 자리에 없던 이사벨도 아합에게 듣고 놀랄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가 가짜 신인 것을 알았으니 마음을 돌이킬 것이다. 주를 떠난 이스라엘이 변화될 것이다. 선지자들이 그것을 위해 노력했었다. 이제는 온전한 믿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조상 선지자들보다 나은 것이 아닐까? 아마 이런 희망과 기대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변화는 없었다. 아합과 이세벨, 이스라엘은 믿음의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놀란다. 낙심하며 좌절한다. 그의 실패는 마음이 세상의 승리와 영광에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예수님도 전도사역에서 승리를 경험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하셨다. 하늘의 구원으로 기뻐하라 하셨다. 바울도 뒤의 일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라 하셨다. 그처럼 신자의 마음은 항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승리에 마음을 두면 기대와 소망도 세상에 두게 될 것이다. 그는 아합과 이세벨의 변화에 희망을 품고 기대했다. 그러나 사람의 변화는 그렇게 쉽지 않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가장 기뻐하는 대상으로 두고 있다면 그에게는 바알이 살아있든 죽었든 상관이 없다. 그 마음은 주께 돌아오지 않는다. 주관적인 그의 믿음은 여전히 돈의 신 바알을 숭배할 것이다. 혹은 바알 대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를 것이다.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주께 돌아올 수 없다. 이 시대 사람들도 그에게 범죄 사실이 있든 없든 이미 자기 마음에 우상이 된 사람을 계속 믿고 따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고 소원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무리 증거해도 세상에서의 풍요와 번영이 우상이 된 사람의 마음은 믿음의 길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가 몸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는가? 부패한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지 않는다면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과 영생의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오늘도 소망을 오직 하늘에 두며 그리스도 예수의 별세와 부활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 십자가의 생활화로 하늘의 아버지께, 영생과 진리의 나라에 마음이 이르기를 소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재물과 그 영광에 소원을 두고 아버지를 떠난 탕자처럼 우리의 마음도 늘 세상의 복을 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의 길을 따르면 하늘의 영광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혼돈과 저주의 땅에서 허망한 승리를 꿈꾸는 것보다 부활이신 예수의 십자가 길을 따라 하늘 아버지께 이르기 원합니다. 헛된 기대와 소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영생과 진리의 나라에 오르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살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