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큐티

언약의 내용을 지킬 수 있을까(느10:1-31)

되어지는대로 2024. 9. 20. 06:09

언약의 내용을 지킬 수 있을까(10:1-31)

 

   느헤미야와 지도자들, 레위인들이 언약서에 서명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스스로 구별한 모든 사람이 언약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거룩한 백성답게 살겠다고, 언약을 어기면 저주를 달게 받겠다고 맹세했다. 언약의 내용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계명 등을 지키는 것이다. 이방인과 혼인하지 않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며, 빚을 탕감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그런 언약을 지킬 수 있을까?

 

   회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의 마지막을 보면 그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다. 지도자들조차 이방의 가문과 혼약을 맺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다. 상인들이 안식일에도 성안에 들어와 물건을 팔았다. 성전을 보살피지 않았다. 헌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이 생계를 위해 성전을 떠났다. 선민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늘의 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고 보이는 세상과 육신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음이 약한 선민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혼인하며 한 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영적 존재로 지은 사람이 타락한 육체로, 고깃덩어리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노의 대홍수로 쓸어버리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외모를 따라, 혹은 자기 소견에 좋은 사람과 혼인하며 세상의 인맥을 확장하려 했다. 세상의 풍요와 번영, 즉 보이는 이익을 갈망하며 추구한 것이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삶이 아니다. 말씀을 등지고 부패와 타락, 죄와 죽음의 저주를 택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스스로 판단하며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죽음의 저주를 초래하는 죄라고 성경은 처음부터 지적했다. 창조주의 사람을 향한 뜻은 늘 주와 동행하며 땅에서 소명을 이루는 것이다. 본래 사람의 복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저주받은 땅의 자연인은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자기 판단과 욕구를 버릴 수 없다. 계시를 받은 선민이라면 그 은혜 앞에서 감격하며 순종을 맹세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일 뿐이다. 끊임없는 세상의 미혹과 요구 앞에서 육신은 연약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등지고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며 따른다. 성전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은 간과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돈과 명성 등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 이 시대 기독교 종교인들도 그렇지 않은가? 문제가 풀리고 소원이 성취되면 기뻐하며 찬양한다. 순종을 맹세한다. 그러나 곧 생활의 염려에 갇히거나, 평안한 삶에 안주하며 성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은 자신과 관계없는 먼 나라의 일로 여기지 않는가? 아직 영생의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계시되고 가능해진 구원이 아닌가? 마음을 다한 하나님 사랑의 생활화, 십자가의 생활화를 놓치고 있다면 여전히 하늘의 참 평강과 기쁨을 모른 채 사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오직 주님 안에서 기쁨과 기도, 감사로 순종하는 삶이기를 소원한다.

 

   말씀하시며 이루시는 주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시고 오래 참으시며 은혜로 이끄시는 주께 찬양을 올립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새 언약의 주 예수를 통해 대속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 연쇄 과정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그 사랑과 은혜를 실감하며 하늘 구원의 평강과 기쁨을 놓치지 않기 원합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주를 거역하는 악에서 구하소서.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나라, 그 소망과 기쁨을 이 땅에서 끝까지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